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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 투기자본에 경영권 넘어갈 위험”

입력 | 2013-08-23 03:00:00

■ 19개 경제단체 “상법 개정안 전면 백지화” 정부에 요구




“상법은 경제계의 헌법이다. 그런데 이번 개정안은 시장경제의 근간을 흔드는 내용이다 보니 공동 건의에 동참하고 싶다는 협회들의 참여 요청이 쇄도했다. 과거 어느 때보다 참여 의지가 높았다.”

전국경제인연합회 관계자는 22일 ‘상법 개정안에 대한 경제계 의견’ 기자회견 브리핑에서 이렇게 말했다.

재계가 상법 개정안을 시작으로 정부와 정치권에 대해 할 말은 하겠다는 분위기다. 상반기(1∼6월) 일감 몰아주기 등에 대한 경제민주화 입법, 남양유업 파문으로 확산된 ‘갑을(甲乙) 관계’ 논란에 제대로 손도 써 보지 못하고 당한 것과는 사뭇 달라졌다.

상반기 경제민주화 법안은 일부 대기업에 국한된 문제였지만 상법 개정안 등의 이슈들은 기업의 규모나 업종에 관계없이 지배구조, 경영권 등에 영향을 미치는 만큼 외연(外延)을 넓혀 적극적으로 대응해야 한다는 공감대를 이룬 것으로 풀이된다. ‘남의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상법 개정안 공동건의에 중소기업중앙회, 한국중견기업연합회 등이 참여한 것도 이 때문이다.

상법 개정안 등은 대기업의 골목상권 침해나 일감 몰아주기처럼 도덕적으로 비난받을 소지가 있는 행위를 규제하는 상반기 이슈들과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점도 재계를 결집시키는 요인이다.

○ ‘보완’ 아닌 ‘전면 백지화’ 요구

이날 전경련 등 19개 단체는 상법 개정안 전면 백지화를 요구했다. 경제계가 ‘보완’이나 ‘단계적 도입’이 아니라 백지화를 요구한 데에는 개정안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내용을 담고 있다는 인식이 깔려 있다.

가장 문제라고 보는 내용은 감사위원이 되는 이사를 선임할 때 대주주 측 의결권을 주주별로 최대 3%로 제한하는 것이다. 지배주주의 사익추구 행위를 견제하고 소액주주를 보호한다는 취지이지만 재계는 이 조항이 시행되면 헤지펀드 등 외국계 투기자본이 지분을 3% 이하로 쪼개는 방식으로 영향력을 극대화해 국내 알짜 기업의 경영권을 차지할 수 있다고 우려한다.

전경련 관계자는 “이사를 뽑을 때 대주주의 의결권을 제한하는 곳은 세계 어디에도 없다”며 “보유한 지분에 비례해 투표권을 행사한다는 시장경제의 근본 원칙에 위배되는 것이며 재산권 침해 등 위헌 소지도 있다”고 지적했다. 특히 투명한 지배구조를 만들겠다는 정부 방침에 따라 계열사 지분을 지주회사 체제로 단일화한 그룹이 더 큰 위험에 노출된다는 점도 문제로 제기된다.

자산이 일정 규모 이상인 상장회사에 대해 집중투표를 의무화하는 조항에 대해서도 재계는 “현재 집중투표제를 의무화한 나라는 러시아, 멕시코, 칠레밖에 없다”며 반발하고 있다. 집중투표제는 두 명 이상의 이사를 선임할 때 주식 1주에 선임할 이사 수만큼 의결권을 주는 제도다.

재계는 집중투표제를 의무화할 경우 2006년 ‘기업 사냥꾼’ 칼 아이칸이 KT&G에서 했던 것처럼 외국 투기자본이 자신의 이익을 대변할 사람에게 표를 몰아주고 단기간에 이익을 챙긴 뒤 한국을 떠나는 일이 늘어날 것으로 보고 있다.

○ 기업 옥죄기, 국민경제에 도움 안 돼

상법 개정안 중 집행임원 분리 선임 제도는 상장회사에 이사회와 별도로 회사 업무 집행을 전담하는 임원을 두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업무 집행 기능을 떼어준 이사회는 경영진을 제대로 감독할 수 있을 것이라는 계산이다. 하지만 재계는 “이사회와 집행임원의 갈등으로 경영 효율성을 해치는 부작용이 클 것”이라며 반대하고 있다.

주주총회에 참석할 수 없는 주주에게 전자투표를 통해 의결권을 행사할 수 있게 하는 전자투표제 의무화에 대해선 본인 인증이 어렵고 확인되지 않은 루머에 따라 의사결정이 좌우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모(母)회사의 주주가 자(子)회사의 이사에게 경영 실패의 책임을 물을 수 있게 하는 다중대표소송제에 대해 재계는 소송 남용의 위험이 있다고 주장한다.

최완진 한국외국어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문제가 되는 다섯 가지 조항은 모두 2011년 상법을 개정할 때 부작용이 더 크다는 결론이 내려졌던 사안”이라며 “기업들이 과감한 투자를 통해 일자리를 만들고 경제를 살리도록 해야 할 시점에 다시 기업을 옥죄는 것은 국민경제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 통상임금과 화학물질등록법에도 적극 대응

재계는 통상임금 범위 확대와 화학물질등록 및 평가에 관한 법(화평법) 이슈에도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고 있다. 박용만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은 21일 취임 일성으로 “통상임금 문제는 생존의 문제”라며 “억울한 피해를 막으려면 지금까지 노사가 합의해 지급해온 임금체계를 존중해야 한다”고 말했다.

현재 재계와 노동계는 통상임금에 고정 상여금 등을 포함시키는 것을 놓고 팽팽하게 대립하고 있다. 법원의 판단도 엇갈려 다음 달 대법원이 공개변론을 한다. 대법원이 통상임금에 고정 상여금 등이 포함된다는 최종 판단을 내리고, 이에 따라 각 사업장 노조가 줄소송을 제기하면 기업들은 최대 수십조 원을 부담해야 할 것으로 예상된다.

5월 국회를 통과해 2015년부터 시행될 화평법은 지금까지 등록의무가 면제됐던 연구개발(R&D) 목적 또는 연간 100kg 미만을 사용하는 소량 화학물질까지 등록하도록 했다. 재계는 “모든 화학물질을 등록하라는 것은 비현실적일 뿐 아니라 비용 부담도 크다”며 화평법 개정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다.

장원재 기자 peacechao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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