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재 기자
최민수에 관해 지금도 기억나는 순간이 있다. 인터뷰 중 “인생철학이 무엇이냐”는 나의 질문에 그는 이런 기괴한 답변을 하였다. “저의 철학이라…. 바로 ‘무시로’이지요. 없을 ‘무(無)’, 시간 ‘시(時)’, 길 ‘로(路)’. ‘나그네가 가는 길엔 시간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이지요. 세상에 놓인 나라는 존재는 그저 왔다가 가는 나그네일 뿐이니까….”
뭔 얘기인진 정확히 모르겠지만 순간적으로 무지하게 감동 먹은 나는 “형님께 많은 배움을 얻어갑니다”라고 말해버리고 말았고, 이에 최민수는 “교학상장(敎學相長)이에요. 서로 가르치기도 하고 배우기도 하는 것이지요. 허허”라고 무슨 신선 같은 답을 하였다.
2008년으로 돌아가 보자. 그는 70대 노인을 폭행하고 자신의 차량에 매단 채 운전한 혐의로 경찰에 불구속 입건되었다. 길에 불법주차한 차를 향해 그가 욕설을 했고, 이를 듣고 “젊은 사람이 그러면 되느냐”고 꾸짖는 노인을 폭행한 혐의였다. 최민수는 “폭행하지 않았다”고 주장했으나, 언론들은 첫날부터 ‘최민수 노인폭행 파문’ ‘연예인 폭력, 도를 넘었다’ 같은 기사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사건 발생 사흘 뒤 최민수는 기자회견을 자청했다. 무릎을 꿇으면서 그는 말했다.
“어떤 이유를 대더라도 이번 일은 용서받을 수 없습니다. 머리 숙여 사죄드립니다. 국민 앞에서 떳떳하고 정당해야 할 배우가 그렇게 못했습니다. 내 자신이 나를 용서 못하겠는데 누가 용서하겠습니까? 무슨 변명을 늘어놓겠습니까? 어제 경찰서에서 진술했습니다. 피해 노인 분도 진술했습니다. (저와 진술이) 일치 안 된 부분이 있다면 내 잘못입니다. 도주, 폭행 등은 사실이 차후에 밝혀질 것입니다. 만약 사실로 밝혀지면 여러분께서 (저를) 용서하지 마십시오.(중략) 마지막으로, 주은아, 내 사랑하는 아내, 미안하다. 이건 아니잖아….”
이후 사건을 조사한 검찰이 무혐의 처분을 내렸지만, 최민수는 산속으로 들어가 2년간 칩거했다. 지난해 방송 토크쇼에 출연한 그는 “무혐의라는 걸 자신이 가장 알 텐데 왜 기자회견에서 무릎을 꿇었느냐”는 질문을 받고는 “억울한 건 내 사정일 뿐이다. 일단 나이 든 분과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다는 자체가 잘못한 것”이라고 말했다.
얼마 전 미국에서의 성추행 의혹 사건에 대해 기자회견을 열어 “지금부터 오직 진실만을 말하겠습니다”라며 사사건건 ‘팩트’ 위주로 해명을 하는 윤창중 전 청와대 대변인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자꾸만 최민수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가 만약 ‘억울한 건 내 사정’이라는 생각을 했더라면 어땠을까. 그가 만약 “사건의 실체는 미국 경찰조사에서 밝혀지겠지만, 이를 떠나 이런 문제를 일으킨 자체로 나는 죽일 놈입니다. 국민들께선 저를 결코 용서하지 마십시오”라고 ‘무조건’ 사죄하면서 아내를 향해 머리를 숙였다면, 이후 상황은 어떻게 전개되었을까.
90%의 억울함보다는, ‘나를 향한 대중의 비판적인 시선’이라는 10%의 사실을 걱정하고 두려워하면서 무릎을 꿇을 줄 아는 자가 진짜 사나이가 아닐까. 이 순간, 지난해 방송된 드라마 ‘추적자 THE CHASER’에서 김상중이 던진 명대사가 퍼뜩 떠오르는 것이다.
“정치라는 건 말이야.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하는 게 아니야. 상대방이 듣고 싶은 말을 해주는 거지….”
이승재 기자 sjd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