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선수 대리인으로서 한참 정신없이 바쁘게 지내던 어느 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차, 지금 내가 뭘 하고 있는 거지? 왜 또다시 내가 아닌, 다른 인생을 위해서 이렇게 뛰어다녀야 하나…’ 순간적으로 자괴감이 몰려왔다. ‘또 다시’라는 표현을 쓰게 된 것은 무의식중에도 어디서 본 듯한 ‘데자뷰’의 느낌 때문이었을 거다.
12년 전 늦겨울, 오랫동안 몸담았던 신문기자를 그만두면서 나는 섭섭하기보단 후련했었다. 보수 많고 안정된 직업을 박차고 나온 뒤에도 한 집안의 가장으로서의 불안감보다는 ‘이제는 내가 주인공으로서 인생을 살아봐야지’라는 의욕이 앞섰던 것 같다.
그렇다고 남들보다 자아현시 욕구가 많은 것도 아니면서 ‘주인공 타령’을 해온 이유를 심리전문가가 아닌 나로선 잘 모르겠다. 어릴 적 위인전을 너무 많이 읽은 탓일는지도 모르고, 젊은 날의 치기였을 수도 있다.
그런데 잠시 자괴감에 시달리다 문득 사방을 둘러보니 ‘대리 인생’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그야말로 취객을 대신해 운전을 해주는 말 그대로의 대리기사로부터 연극배우, TV 연기자, 변호사, 종교인, 심지어 정치인까지. 국회의원도 결국 주민의 의사를 대변하는 대리인이고, 대통령 역시 국민들의 위임을 받은 대리인이 아닌가. 이렇게 보면 누가 주인공이고 누가 대리인인지 헷갈리는 미로게임에 빠져들고 만다.
결국 모든 게 직업의 차이일 뿐이라고 깨닫는 데 수 십년이 걸린 것이다. 보는 각도에 따라서 대리인생이 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으며, 대리인생이 나중에는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평범한 사실을 자각하기까지.
물론 대리인도 나름 차이는 있을 것이다. 한사람(선수)을 대리하는 사람(에이전트)과 수만, 수천만을 대리하는 사람(정치인)은 격이 다르다고 볼 수도 있다. 다만 정치인은 불특정 다수를 대리하는 사람들이기에 책임소재도 애매하고 불분명한 경우가 많지만 에이전트는 대리의 대상이 뚜렷하고 책임소재 역시 분명하다. 같은 대리인생이지만 색깔은 많이 다른 것이다.
(주)지쎈 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