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보 미혼여기자 일일종부체험서 ‘소통-화합의 리더십’을 배우다
정재 종택 마당에서 종부 김영한 씨(오른쪽)가 종부 체험에 나선 신성미 기자에게 손수 담근 간장을 보여주고 있다. 왼쪽 사진은 종택 안방의 벽에 걸려 있는 열쇠꾸러미. 사당과 창고 등을 여는 이 집안의 보물이다. 안동=이훈구 기자 ufo@donga.com
○ 안동식혜, 커피믹스면 될 텐데…
280여 년의 역사를 지닌 고택에 들어서자 정재 선생의 6대 종부 김영한 씨(60)는 설을 앞두고 음식 준비에 한창이었다. 재래식 아궁이에 나무로 불을 때고 호호 입김을 불어가며 가마솥에 찹쌀을 찌는 중이었다. 안동식혜를 만들기 위해서였다. 안동식혜는 감주와 달리 밥에 무를 썰어 넣고 생강즙과 고춧가루를 풀어 엿기름물로 삭힌 안동의 별미다.
종부는 기다렸다는 듯 기자에게 흰 앞치마를 내밀었다. 찹쌀을 찌는 사이 주방 바닥에 앉아 무를 잘게 썰어 달라고 했다. 한번 잘해 봐야지. 마음 단단히 먹고 주방 바닥에 앉아 무를 잘게 썰기 시작했다. 깍둑깍둑! 30분이 지나자 어깨와 허리가 결리고 다리가 저려온다. 1시간이 지나자 허리도 깍둑깍둑 썰려 나가는 것 같다. 단순 반복 노동 속에 내가 무가 되고, 무가 내가 되는 것 같을 때쯤 하늘이 노래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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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손이 많이 가는 안동식혜가 정작 차례상에 안 올라가는 음식이라는 걸 알게 된 순간 머리가 띵했다. “손님들한테 커피믹스 타드려도 되지만 그래도 명절인데 안동 전통음료를 대접하면 기분 좋잖아요. 또 명절에 기름진 음식 먹고 속이 더부룩해지기 쉬운데 안동식혜는 소화에 좋거든요.”
가마솥에 찹쌀이 타지 않는지 수시로 살피면서 물을 보충해야 했다. 아궁이가 있는 밖으로 나올 때마다 차가운 겨울바람이 옷 속을 파고들었다. 전기밥솥으로 하면 편한데….
○ 호두야, 웬수야
종손 류성호 씨가 과수원 일을 마치고 오자 김 씨는 남편과 기자 앞에 말린 호두 더미를 내놓았다. 난생 처음 까보는 호두는 발레 ‘호두까기 인형’ 같은 낭만과는 거리가 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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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마 1시간 내내 깠는데도 호두 알맹이는 밥그릇의 반도 못 찼다. 마트에 가면 예쁘게 까놓은 호두 많은데…. 이렇게 고생해봤자 알아주는 사람도 없을 테고. 종부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깐 호두 사오면 안 되느냐고.
“깐 호두를 살 수도 있지만 이왕 집에서 키운 신선하고 맛있는 호두를 차례상에 올리는 게 좋잖아요. 가족이 모여 호두를 까는 것은 오순도순 대화하는 시간이기도 해요. 그러고 보면 제사는 조상을 기리는 의례일 뿐 아니라 후손을 화합시키고 교육하는 조상들의 지혜죠.”
듣고 보니 기자는 호두를 까면서 종손 종부와 더 깊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호두를 더 예쁘게 까겠다는 오기마저 생겼다. 어느새 기자는 종부의 정성에 감화되어 그 리더십을 따르고 있었다.
○ 종부는 부엌데기 아닌 화합의 리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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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씨는 1975년 중매로 시집와 39년째 휴일도 없이 매일 오전 5시에 일어나 음식 준비와 고택 관리에 매달린다. 하루 서너 차례씩 방문하는 손님들도 대접해야 한다. “물론 가끔 스트레스를 받지요. 하지만 고된 부엌일만이 종부 역할의 전부는 아닙니다. 수많은 손님을 만나고 종가를 이끌면서 화합하는 분위기를 만들어야 하고요.”
종가의 복잡한 형식은 시대 변화에 맞게 유연하게 바꿀 필요도 있어 보였다. 이 집도 요즘에는 떡국에 쓸 가래떡을 시내 떡집에서 뽑아 썰어오고, 강정도 사오니 일은 조금 줄었다고 한다. 김 씨는 제사는 ‘형식’보다 ‘정성’이라며, 종부의 대를 이을 맏며느리에게도 “나중에 물 한잔만 떠놓고 제사를 지내줘도 좋으니 정성만 들여 달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개인보다 공동체를 우선하고 친지, 이웃들과 교류하는 과정에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는 것이 종가의 미덕이다. 6일 안동 한국국학진흥원에서 만난 김병일 원장은 이렇게 말했다. “종부는 보살핌과 배려, 섬김과 나눔을 실천한 여성적 리더십의 표본입니다. 역사 속에 묻혀 있던 종부의 리더십은 오늘날 주목할 가치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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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신성미 기자 savori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