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국스타 + 한류시스템’의 현지화… 케이팝의 야심찬 새 도전
노래와 댄스 등 케이팝의 DNA를 ‘수혈’받은 태국 가수 나튜(가운데)와 백댄서들이 현지에서 발표할 음반의 분위기에 맞춘 춤 동작을 선보였다. 이들은 한국에서 온 신규진 (왼쪽)의 지도로 케이팝 댄스를 다시 배웠다. 방콕=김갑식 기자 dunanworld@donga.com
“…She’s Bad, Bad, Bad, She’s Bad, Bad, 날 믿지 마. 어차피 넘어갔어 날 믿지 마. 나도 어쩔 수 없어 사랑, 사랑, 사랑, 사랑….”
영어 가사가 들린다 싶었는데 어느새 우리말로 바뀌었다. 거울로 장식된 연습장 안에는 태국 가수 나튜(24)와 백댄서 4명이 음악에 맞춰 춤을 추고 있었다. “…So, So, Bad, 너무 뻔해도 어쩔 수 없어 너무 달콤해….”
짧은 휴식 시간이 주어지자 카리스마 있는 표정으로 댄스에 열중하던 나튜가 “아으” 하며 신발과 양말을 서둘러 벗고 발가락을 부여잡았다. 그의 왼쪽 엄지발가락은 며칠 전 수영하다 다쳐 붕대를 감은 상태였다. 후보 멤버 1명을 포함한 백댄서 5명은 댄스 선진국에서 온 ‘춤 선생’의 동작을 하나도 놓칠 수 없다는 듯 반짝반짝 눈빛이 빛났다.
“태국에는 케이팝 댄스를 배우는 춤꾼이 많다. 케이팝 댄스의 스타로 꼽히는 미스터 신에게 직접 배워 영광이다. 무엇보다 케이팝 댄스는 강하고 날카로운 동작이 인상적이다.”
멤버 중 가장 젊은 동(18)의 말이다. 백댄서들은 춤 경력 2∼4년 차로 18∼23세의 젊은이들. 한 백댄서는 춤이 무엇이냐고 묻자 “솔(soul·영혼)”이라고 답한 뒤 태국어로 “짓 윈 얀”이라고 했다.
신 씨는 “멤버들이 오랫동안 케이팝 댄스를 연습해 전반적인 춤 수준은 괜찮다”면서도 “춤 하나를 위해 수십 시간 무대에서 땀을 흘리는 케이팝 댄서의 열정과 헝그리 정신은 아직 배우지 못한 것 같다”고 말했다.
태국 방콕의 쇼핑몰에서 열린 ‘나튜’의 쇼케이스 무대. CJ E&M 제공
쇼케이스 뒤 나튜는 자신이 주인공이 된 케이팝의 진화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노래와 댄스, 한국어까지 짧은 시간에 한꺼번에 배워야 하는 쉽지 않은 작업이었다. 내가 누구보다 열광적인 케이팝 팬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런 국제적인 프로젝트의 첫 주자가 돼 무척 기쁘다.”
현장에서 만난 가수 겸 배우 삿타뽕 피앙포(24)는 “나튜의 변신이 태국에서의 성공으로 이어지기를 바란다”며 “기회가 되면 나도 도전하고 싶다”고 말했다. 현지 매체인 HNT미디어의 핌차녹 와리라타나롯 기자(26)는 “한국까지 가서 케이팝을 배워야 하느냐는 부정적인 의견도 있지만 대부분은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며 “태국의 개성을 살린 가수들이 국제화할 수 있는 기회를 얻으면 좋겠다”고 했다.
▼“아이돌 편중 탈피 장르 다양화해야”▼
태국의 한류 사이트를 운영하는 웹 마스터 찻차이 아수아히룬킷 씨(왼쪽)와 GMM 그래미의 매니징 디렉터 수리차이 센시리 씨. 방콕=김갑식 기자 dunanworld@donga.com
16일 태국 방콕 수쿰윗 가의 한 호텔에서 만난 한류 웹사이트(www.popcornfor2.com)의 웹 마스터 찻차이 아수아히룬킷 씨(38). 10년 전 시작한 이 사이트는 처음 한국 영화 리뷰를 시작으로 드라마와 케이팝의 최신 정보를 소개해 태국 내 한류 확산에 기여하고 있다.
실제 현지에서 케이팝을 포함한 한류의 시차는 24시간을 넘지 않는다. SBS ‘일요일이 좋다-런닝맨’, MBC ‘우리 결혼했어요’ 등 국내 예능 프로그램의 경우 방영 다음 날이면 태국어 자막으로 볼 수 있다. 이 사이트의 하루 방문자는 4만 명에 이른다. 현지 최대 포털인 사눅닷컴이 10만 명 수준이다.
그는 10년간에 걸친 케이팝의 변화에 자신도 놀랐다는 표정을 지었다.
“방콕에서만 케이팝이 인기 있는 게 아니다. 지방의 시장에서도 싸이의 ‘강남스타일’이 흘러나온다. 10년 전 태국에 중국 붐이 일려고 할 때 케이팝이 들어와 곧 대세가 됐다.”
케이팝의 인기는 현지 팬 문화에도 큰 변화를 초래했다. 태국에서는 거리에서 연예인을 만나도 덤덤한 분위기이지만 케이팝 팬들은 다르다는 얘기다. 슈퍼주니어, 소녀시대 등 개별 그룹을 좋아하는 팬클럽은 공항을 찾아가고, 이벤트가 있으면 선물도 준비하는 등 한국과 비슷한 분위기다.
아수아히룬킷 씨는 케이팝 확산에 따른 거부감은 없냐고 묻자 “일각에서 지나치다는 의견도 있지만 큰 목소리는 아니다”라며 “SM 소속 아이돌 그룹은 따라 부르기 쉬워 중독성이 강하고, YG 쪽은 덜 대중적이지만 강렬하다. 아이돌 그룹이 비슷하다고 하지만 차별성이 있어 케이팝 인기가 쉽게 식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17일 같은 수쿰윗 가에 있는 태국 내 최대 엔터테인먼트 업체인 GMM 그래미. 입구부터 소속 연예인의 사진과 작품 사진들이 눈에 띈다. 이 회사는 방송, 드라마, 영화 등 다양한 영역에 진출해 있지만 특히 음악 분야에서의 영향력은 절대적이다. 현지 음반 시장의 80%를 차지하고 소속 가수만 300여 명에 이른다. 그래서 이 빌딩은 스타로 가는 ‘꿈의 빌딩’으로 불린다. 이 회사의 매니징 디렉터인 수리차이 센시리 씨(44)는 케이팝의 미래에 대해 조심스러운 반응을 보였다. 그는 수십 차례 방한한 케이팝 전문가다.
“대부분의 아이돌 그룹이 너무 비슷하다는 것이 큰 단점이다. 지나치게 아이돌 그룹 위주로 돌아가는 한국 내 방송과 음악 시장의 분위기도 심각한 ‘독’이 되고 있다.”
개인적으로 그는 가수 윤도현이 리더로 활동하는 YB밴드의 팬이라고 했다. 그는 “우연히 YB밴드의 음악을 들었는데 강렬하고 매력적이었다”며 “록과 힙합 등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해외에 진출시켜 다양성을 확보하는 것이 케이팝의 장수 비결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방콕=김갑식 기자 dunanworld@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