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인휘 이화여대 국제학부 교수
지금 대학생들은 도저히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적어도 당시에는 ‘해전사’라는 말 자체만으로도 가슴이 시려오고 또 그저 막연한 사회적 책무감으로 안절부절못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 시절 ‘해전사’를 읽으며 대학생활을 한 1980년대 초중반 학번의 학자 16명이 모여 최근 ‘탈냉전사의 인식’, 저자들의 표현을 빌리면 ‘탈전사(脫戰史)’를 출간했다. 2012년 현 시점에서 한국인의 삶의 기원은 어디인가에 대한 질문에 답하고자 꼬박 3년 가까운 시간이 걸렸다.
‘탈전사’에 모인 16명의 학자는 대체로 1990년도를 전후로 한 ‘세계화’로의 진입이 우리 사회의 현대적 기원이라는 데 견해를 같이했다. 일견 당연한 얘기처럼 들릴 수 있지만, 지금까지 세계화의 옳고 그름을 논하는 가치지향적인 논쟁은 많이 있었지만, 세계화라는 인류보편적인 현상이 한국 사회에 내재화되는 과정에 대한 종합적인 탐구가 거의 없었다는 점을 상기할 때, 나름 의미 있는 성과였다고 자찬하고 싶다.
한발 더 나아가, 저자들 사이에선, 19세기 말 서구 문명에 대한 이해의 부족이 일제강점기의 역사로 이어졌고, 냉전질서 태동에 대한 국제적 안목의 결핍이 한반도 분단으로 이어졌음을 교훈 삼아, 탈냉전적 세계화의 흐름이 우리의 운명을 또다시 불운한 길로 인도하지 않아야 한다는 결기에 찬 다짐이 작용하기도 하였다.
‘해전사’와 ‘탈전사’라는 어감(語感)과 문제의식의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두 작업 사이에는 매우 다양한 차이점이 존재하고 있다. 선배 학자들에게는 해방 직후의 공간이라는 당시로서는 ‘금역’의 대상을 다루는 ‘학자적 용기’가 필요했던 반면, 탈전사에 참여한 필진의 경우 지난 20년간 진행된 한국 사회의 변화를 설명하는 매우 다양한 관점과 이론들을 관통하는 일관된 물줄기를 찾아내야만 하는 ‘밝은 눈’이 필요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해전사’ 이후 30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지만, 해전사가 고민한 우리 사회의 몇 가지 문제점은 여전히 유효하다는 점에 마음이 몹시 무거웠다. ‘탈냉전적’ 분단체제와 양극화의 심화가 그 대표적인 예라고 본다. 이런 이유 때문에, 꽤 긴 시간이 흘렀지만, 해전사와 탈전사 사이에 놓인 한국 사회의 역사적 간극은 때로는 발전적으로 또 때로는 반복적으로 보인다.
책장에 꽂혀 있던 빛바랜 ‘해전사’ 1권을 펼쳐보니, 첫 장에 내가 적은 ‘하늘 한 번 쳐다보고’라는 문구가 있었다. 책 한 권 구입하는 게 뭐 대단한 일이라고 ‘하늘 한 번’ 쳐다보겠다는 치기(稚氣) 어린 낙서가, 세월이 흘러 이제는 ‘고개 숙여’ 독자들과 세상의 평가를 기다리는 입장이 되었다. ‘탈전사’에 참여한 막내 필자로서 지난 3년 가까이 함께한 선배 및 동료 학자들과의 마음속 우정이 감사할 따름이다.
박인휘 이화여대 국제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