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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시대-인사가 만사다] 대통령실장- 역대 실장들의 명암

입력 | 2012-12-25 03:00:00

고도의 정치력 요구… 성공사례 손꼽을 정도




 

역대 대통령실장(비서실장) 중 대통령 전용기(공군 1호기)를 탄 사람은 거의 없다. 대통령이 해외 순방에 나설 때에는 대통령을 대신해 청와대를 지켜야 하기 때문이다. 이 기간에는 가급적 서울도 벗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대통령이 국내에 있을 때는 대부분의 시간을 함께 보낸다. 수석비서관회의는 물론이고 각종 긴급회의에 당연직으로 참석한다. 대통령실장이 청와대 직원 중 유일하게 청와대 인근에 관사를 두고 있는 것도 이런 점을 감안한 것이다.

그만큼 대통령실장에게 요구되는 자질은 어떤 자리보다 복잡하고 까다롭다. 대통령실장이 ‘청와대 왕수석’이자 ‘총리급 정무장관’ ‘대통령의 아바타’로 통하는 것도 이런 고도의 능력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1987년 대통령직선제 개헌 후 딱히 성공한 대통령을 꼽기 어려운 것처럼 성공적이었다는 평가를 받는 대통령실장이 드문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 청와대 조직 장악의 어려움

이명박 정부가 출범한 직후인 2008년 4월 21일 오전 4시 반. 청와대 직원들은 갑작스러운 휴대전화 메시지에 잠을 깼다. 발신지는 청와대. ‘새벽에 비상소집이 있으니 전 청와대 직원은 오전 6시 반까지 각자의 사무실로 출근하라’는 내용이었다. 상당수 직원은 시간을 맞췄으나 평소처럼 오전 7시 전후에 출근한 직원들은 경위서를 제출해야 했다.

이명박 정부 청와대 첫 ‘새벽 점호’의 주인공은 바로 정권의 핵심 실세였던 류유익 초대 대통령실장이었다. 류 실장은 이 대통령이 미국을 순방 중인 만큼 청와대 직원들의 근무 기강을 점검하기 위해 새벽 점호를 실시했다고 주변에 설명했다.

그러나 청와대 직원들은 “이런 식으로 전근대적 관리를 하는 게 대통령실장의 역할이냐”며 적잖게 반발했다. 최고 엘리트급 공무원과 대선 캠프를 거친 ‘개국공신’은 물론이고 대학교수 등 전문가 집단이 뭉친 청와대 조직을 장악하려면 그에 걸맞은 정치력을 발휘해야 했다. 당시 비상소집에 응했던 청와대 관계자는 “류 실장은 군기반장 역할을 자처하려 했지만 그 방식이 워낙 세련되지 못해 직원들의 실망감이 적지 않았다”고 말했다.

류 실장은 서울대 지리학과 교수 출신으로 이 대통령의 싱크탱크인 국제정책연구원(GIS)을 이끌며 주요 정책과 메시지를 관리했지만 공조직을 제대로 다뤄본 적은 없었다. 결국 류 실장은 그해 미국산 쇠고기 수입 결정에 따른 촛불시위 파동으로 취임 4개월 만에 낙마했다.

그렇다고 정치인 출신 대통령실장이 청와대 조직 장악에 성공한 것은 아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당선 직후 첫 대통령비서실장으로 관록의 문희상 의원을 임명했다. 당시 현역 재선 의원에 김대중 정부에서 이미 대통령정무수석비서관을 지낸 데다 둥글둥글한 성품으로 정치권에 적이 별로 없는 것으로 정평이 난 그였다.

하지만 문 실장 재임 당시인 2003년 이광재 당시 대통령국정상황실장의 정보 독점 여부가 논란이 됐고 결국 여당인 열린우리당의 천정배 원내대표는 공개적으로 불만을 토로하면서 이른바 ‘이광재 파동’이 발생했다. 당시 청와대 관계자는 “문 실장이 선거 과정에서 노 대통령의 당선에 큰 기여를 하지 않아 노 대통령의 핵심 측근들에게는 별다른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었다. 그만큼 청와대 조직 장악은 요원했다”고 말했다.

○ 하루에도 몇 차례 여의도 오가야

이명박 정부 들어 대통령실장에 대한 비판 중 하나는 정치력 부재다. 이 대통령이 실용 정부를 강조하며 ‘탈(脫)여의도’를 한다고 해서 대통령실장까지 여의도 정치권과 접촉을 꺼리거나 심지어 차단한 데 따른 것이다.

현 정부 초대 류 실장 집무실 한쪽에는 오랫동안 서류가 탑처럼 쌓여 있었다. 류 실장은 서류 내용을 일부러 물어보지 않았는데, 이는 집권 초기 여야 정치인들이 류 실장에게 보낸 각종 민원 서류였다. 지역구 예산부터 각종 행정 관련 민원들이 망라되어 있었다.

청와대 핵심 관계자는 “성공적인 국정 운영을 위해서는 정치권의 이해와 협조가 필수적이다. 무턱대고 민원을 들어줄 수는 없겠지만 합리적인 건의는 수용하면서 국정 운영에 협조를 당부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데 현 정부 초반엔 그런 정치적 융통성이 없었다”고 전했다.

후임 정정길 대통령실장은 행정학 교수 출신(울산대 총장)임에도 이런 지적들을 감안해 한동안 여야 정치권 인사들을 꾸준히 접촉했다. 필요하다면 여의도로 직접 갔고 종종 청와대 인근 삼청동의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으로 초대하곤 했다.

하지만 정치권 경험이 없는 터라 이런 행보에는 한계를 노출할 수밖에 없었다. 이 기간에 이 대통령이 전력을 다해 추진한 세종시 수정안이 박근혜 당선인 주도로 부결됐고 결국 2010년 7월 임태희 당시 고용노동부 장관으로 교체됐다.

이 대통령의 당선인 시절에도 비서실장을 맡았던 임 실장은 정책능력은 물론이고 정치력을 갖춘 인물로 평가받았다. 실제로 임 실장은 임기 초 수시로 여의도를 찾아 여야 의원들을 접촉했다. 그러나 나중에는 청와대 내부 조직 장악에 신경을 쓰면서 여의도와의 네트워크가 헐거워졌다는 지적을 받았고 결국 2011년 서울시장 재선거 패배에 책임을 지고 물러났다.

노무현 정부의 두 번째 비서실장인 김우식 비서실장은 연세대 총장 출신으로 정치권과 별 인연이 없었다. 스스로 “내가 과연 실장 역할을 잘할 수 있을까 싶어 버티다가 청와대에 들어갔다”고 회고했을 정도다. 그는 취임 후 “이제 코드, 비(非)코드를 떠나 인화로써 뭉쳐야 한다”고 강조했지만 당시 열린우리당 내 강경 개혁파의 반발 등에 밀려 1년 반 뒤 물러났다.

○ 대통령에게 ‘노’라고 말한 사람 거의 없어

역대 대통령실장 중 대통령에게 제대로 직언을 한 경우도 그리 많지 않다. 임태희 실장도 이 대통령에게 대북정책의 중요성 등은 좀 더 세게 말했어야 했다고 회고했다. 그는 “현 정부 들어 내내 남북 관계가 경색됐는데 내가 실장으로서 좀 더 강하게 관계 회복을 권유했어야 했다”고 말했다.

그나마 김대중 정부 초대 비서실장인 김중권 실장이 조직을 장악하며 대통령에게 직언을 한 경우로 꼽힌다. 영남(경북 울진) 출신이자 민주정의당에서 국회의원 배지를 달았던 김 실장은 김대중 대통령의 부름을 받고 이른바 ‘중앙집권적 비서실’을 운영하며 필요하면 김 대통령에게 직보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김 전 실장은 “국정 전반에 대한 지식을 갖고 실질적으로 대통령을 밀착 보좌하며 필요하면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승헌·홍수영 기자 ddr@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