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응수가 1962년 숭례문 중수현장 갔던 날
대목장 신응수는 중졸 학력이 전부이지만 기억력과 눈썰미, 손재주가 뛰어났다. 그러나 무엇보다 성실하고 부지런했다. 자신이 중건의 총책임을 맡았던 경복궁에서 그가 선이 빼어난 근정전 처마 쪽을 바라보고 섰다. 김미옥 기자 salt@donga.com
○ 나무를 다루다
“어, 잘하네. 저놈 목수일 시키면 잘하겠다.” 사촌형이 일하는 곳에 심부름 간 어느 날. 연장을 쥐여주기에 그냥 한 것이었다. 끌로 나무에 구멍을 파보라고 해서 팠고, 대패질을 한번 해보라기에 했다. 시골에서 일하며 컸고, 그동안 목수들 일하는 걸 눈썰미 있게 봐왔던 터였다. 1958년 중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충북 청원군 오창면에서 상경한 지 서너 달, 신응수는 목수가 됐다.
“지금 생각하면 중학교 갓 나온 애를 (목수일) 못 시킬 것 같아. 굉장히 힘들어. 연장 다루기가 얼마나 힘들어요.그렇다고 어려서 잘 먹기를 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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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그에게 사촌형이 “얘는 데려다가 야간학교라도 보내겠다”며 적어주고 간 자신의 서울 집 주소는 한줄기 희망이었다. 누구든지 어디든 가서 입 하나 덜면 집에도 보탬이 될 때였다. 사촌형 주라고 집에서 싸준 메주며, 바가지며 바리바리 지고 들고 온 서울행이었다. 하지만 동사무소 급사로 일하며 저녁에 고등학교를 다닐 것이라는 꿈은 그만둔다던 급사가 마음을 바꿔 먹는 통에 사라지고 말았다.
집에서 무허가로 미용일을 하던 사촌형수를 도와 숯불을 지펴 파마약을 달구기도 했고, 고향 친구가 일하게 된 구둣방에 일자리를 사정하다 거절도 당해봤다. 전기공사를 하는 육촌형도, 칠을 하는 사촌형 친구도 찾아가봤지만 빈손으로 돌아와야 했다. 그는 청소년 백수였다.
6·25전쟁 후 서울에는 한옥을 지어서 파는 집장사들이 많았다. 사촌형은 집장사들의 조그만 한옥을 짓는 목수들 중 우두머리였다. 그는 사촌형이 품삯을 받아오라면 가서 받아오는 심부름을 하고, 사촌형 일터에서 잡일을 거들다가 결국 연장을 쥐게 됐다. 얹혀사는 신세가 처량하기도 하고, 사촌형 부부 문제에 괜히 끼어들게 됐다가 심한 꾸지람을 듣고는 잠시 귀향을 한 적도 있다. 하지만 나무를 다루는 일은 50년 넘게 그의 일이 됐다. “(운명이라는 게) 있는 것 같아요. 내가 (서울 올라와서) 그때 취직이 됐으면 지금 뭘 하고 있을까….” 그러나 목수일을 천직으로 삼기 위해서 그는 숭례문을 만나야 했다.
○ 거목과의 기싸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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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응수에게 숭례문 중수 현장은 바로 매장을 치는 경험과도 같았다. 일반 목수라면 평생 만져보기도 힘든 웅장한 재목을 스무 살 무렵에 접하게 되면서 그는 거목에 익숙해질 수 있었다. 당시 숭례문 기둥에 쓰일 나무는 장정 열여섯 명이 목도(무거운 물건이나 돌덩이를 얽어맨 밧줄에 몽둥이를 꿰어 양쪽에서 나르는 일)를 메야 겨우 운반할 수 있었다. 제재소에서 우마차에 싣고 온 나무를 한 걸음씩 숭례문 쪽으로 옮기다 쉬다 하면 옆에서 막걸리통을 멘 인부가 따라가면서 술을 한 잔씩 따라줬다. 숭례문이라는 단 한 채의 건물을 짓기 위해 펼쳐놓은 장대한 나무들의 광경은 그의 마음을 바꿔 놓았다.
그전까지 그는 양식 목수일이건, 한식 목수일이건 어디 가서 일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대패질 열심히 하고 구멍 파라는 곳을 끌로 잘 파내고 연장을 들고 뚝딱거린 다음에 목수로서 품삯만 받으면 된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나무들의 장관을 보며 그의 마음은 쿵쾅거렸다. “그동안 내가 해오던 목수일이라는 것이 다 같은 게 아니었구나. 내가 했던 것은 진정한 대목(기둥, 보, 도리, 공포 같은 집의 구조를 담당하는 목수)의 일이 아니었구나 하는 걸 느껴버린 거죠. 그때 완전히 내가 변한 거였어요.”
신응수는 스승을 잘 만난 사람이다. 궁궐목수의 대를 잇던 이광규 선생이 계셨고, 숭례문 현장에서는 이 선생의 스승인 조원재 선생과 인연을 맺어 설계와 제도를 배웠다. 거기에 더해 거목과의 이른 조우가 그를 성장시켰다. 이후 1970년 부편수(도편수 바로 밑에서 다른 목수들을 관리, 지휘하는 역할)로 불국사 복원 공사를 하고, 1975년 도편수(집을 지을 때 책임을 지고 관리하는 우두머리 목수)가 되어 수원 장안문을 복원하면서 맞닥뜨린 수많은 거목들 앞에서 그는 기죽지 않았다.
“도편수는 기싸움에서 나무에 지면 안 된다는 걸 그때 알았지요.” 기싸움에서 지고 들어가면 어김없이 실수가 나온다. 물론 나무 앞에서 겸손해야 하지만, 1000년을 버틸 집을 지으려면 또한 나무를 완전히 압도해야 하는 것이다. 이후 그를 사방에서 찾았다. 삼성그룹 고 이병철 회장이 한남동 자신의 자택으로 쓸 승지원을 지을 때 ‘목수는 신응수’라고 아예 정해서 비서실에 내려 보냈을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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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응수는 자신이 재주가 뛰어나서가 아니라 시대의 운을 잘 타고났기에 지금에 이른 것 같다고 말한다. 우리나라의 큰 문은 모두 다섯 개다. 서울의 숭례문 흥인지문과 광화문, 수원의 장안문 팔달문이다. 이 중 숭례문 광화문 장안문이 그의 손을 거쳐 중수, 복원됐다. 그게 다 때를 잘 맞춰 목수일을 한 덕이 아니겠느냐는 말이다.
그러나 그의 한옥에 대한 고집과 일에 대한 열정은 보통을 넘는다. 차를 타고 가다가도 처음 보는 기법으로 지은 한옥이 있으면 꼭 멈추고 들여다봐야 직성이 풀렸다. 1973년경이었다. 이광규 선생이 한 골프장에서 문을 만들어달라는 주문을 그에게 넘겼다. 골프장 사장은 창덕궁 연경당의 아(亞)자 문양을 넣어달라고 했다. 신응수는 경비원 모르게 나무를 타고 연경당 담을 넘어 들어가 누(樓)마루 밑에 숨어서 그 문양을 일일이 자로 재고 스케치를 했다.
그는 인터뷰 전날 자신이 직접 소나무를 기르고 있는 강릉에 다녀왔다고 했다. 불에 탄 숭례문 복원작업 중에 추녀를 해놓은 것이 도통 마음에 들지 않아 다시 나무를 골라 켜놓았다는 것이다. 비용을 생각했다면 쉽사리 결정할 수 없는 일이다. “이것 해서 밑지면 안 된다는 마음으로는 일을 못합니다. 돈을 좇아서 하기보다는 자기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다 보면 자기 일에 저절로 힘이 붙게 됩니다.”
그가 사랑하는 적송(赤松)은 다른 나무에 비해 나이테가 촘촘하고 그만큼 단단하다. 한눈팔지 않고 달려온 50년, 그의 목수 인생 나이테도 그럴 것이다.
민동용 기자 mind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