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움의 미학’ 가르쳐주신 청전 이상범 선생님
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soojin@donga.com
그림과 인연이 있다고 느끼지 못했던 초등학교 시절, 이봉상 선생 작업실은 6·25전쟁 당시 방공호로 썼던 곳이다. 화실에는 유화물감이 천지였고, 당시 나는 그 유화물감의 성질을 모른 채 가져다가 물을 섞어 그리려고 했는데, 서로 섞이지 않아 그림은 시작도 못했다. 나중에야 기름을 섞어 그리는 유화물감인 줄 알게 되었다.
결정적으로 그림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야구 특기생이었던 중학교 때 야구선수의 길이 무산된 후였다. 초등학교 때 당했던 교통사고의 후유증이 중학교 시절 심해져 야구선수의 길을 접어야 했던 것이다. 당시 목수였던 아버지는 내게 가끔 연장을 가져오게 하는 등 잡다한 일들을 거들게 했다. 해서 아버지가 나에게 목수업을 물려주실 것이라고 막연하게 생각했는데, 전혀 다른 일이 일어났다.
그분은 당시 별 말씀 없이 집에 있던 초배지에 몽당붓으로 난초 한 점을 그려 주시며 “그대로 한번 그려 보거라” 한마디 하시고는 가셨다. 나는 그림을 똑같이 그려보겠다는 일념으로 하루에도 몇 장씩 수십 장을 그리기에 이르렀다. 선생님을 다시 보게 된 것은 한 달 뒤였다. 잔뜩 그려온 그림을 내놓으며 내심 칭찬을 기대했던 나는 도리어 벼락같은 불호령을 들어야 했다. 알고 보니 모사할 종이가 모자라 선생이 그려준 채본 위까지 여백이 없을 정도로 연습을 했던 것이다. 그때 야단맞은 선생의 분신과 같은 채본을 아직도 보관하고 있다.
선생의 정식 제자로 청연산방에 들어가게 된 것은 6개월이 지난 뒤였다. 그때 선생께서는 모사를 뛰어넘어 사물의 본질을 보는 법을 가르치셨던 것 같다. 처음 주어진 과제는 정원에 떡하니 자리 잡고 있는 못난 바위였다. 나는 그 바위를 수없이 그리곤 했다. 그때는 사물의 ‘본질’을 깨닫기에는 어렸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동양화의 교본과 같은 ‘개자원화전’을 벗어나 나만의 개성과 조형의식을 터득하게 하셨다는 것을 알게 됐다.
선생은 댁에서 각종 새들을 기르셨다. 우리 속의 꿩, 금계, 은계 등의 특성과 신체적 구조뿐만 아니라 조류가 가지고 있는 세세한 움직임을 면밀하게 관찰하여 그려보게 하셨다. 바위는 정적인 표현을, 조류는 동적인 표현을 가르치는 대상이었다. 선생은 모든 사물의 겉모습보다는 그 존재감과 의미에 충실하기를 원하셨다. “화인은 늘 붓을 놓지 말아야 한다”고 말씀하신 선생은 그것을 몸소 실천해 보이신 분이셨다.
20세가 되었을 때 선생의 허락을 받지 않고 국전 공모전에 출품한 적이 있는데, 이때 받은 큰 꾸지람을 잊을 수가 없다. 한 스님이 산사로 걸어가는 모습을 그렸는데, 선생은 구도와 인물의 비례가 맞지 않으니 필요치 않은 것은 넣지 말아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그것은 동양화의 비움의 미학이었는데, 상을 타기 위한 욕심의 비움과 화면의 비움을 동시에 가르쳐 주셨던 것이다.
내 인생의 황혼녘에 서서 뒤돌아보니 ‘화격은 곧 인격’이라시던, 나를 사춘기 방황의 늪에서 건져주신 청전 선생이 결국 오늘의 나를 있게 해준 분이시다.
석철주 화가·추계예술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