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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횡설수설/신광영]‘동정 유발’ 패션

입력 | 2012-04-02 03:00:00


지난달 27일 미국 워싱턴의 형사법정에 똑같이 뿔테 안경을 쓴 흑인 남성 5명이 들어섰다. 총으로 5명을 살해한 혐의를 받는 피고인들이었다. 유일하게 혐의를 인정한 피고인 한 명에게 검사가 물었다. “나머지 4명이 전에 안경을 쓴 적이 있나요?” 그 피고인은 “안경 쓴 것 오늘 처음 봤다”고 했다. 그 4명의 안경은 모두 도수가 없는 ‘소품’이었다. 강력범들이 착하고 유약하게 보이려 체형보다 큰 양복을 입거나 머리를 단정하게 깎곤 했는데 한 단계 진화한 패션이었다. 흑인 용의자들이 뿔테 안경을 쓰면 ‘더 지적이고 정직하며 덜 위협적으로 보인다’는 미국 범죄심리학회의 연구결과(2008년)도 있다.

▷배심원 재판이 많은 미국은 ‘동정 유발’ 패션 분야에서 앞서가고 있다. 남자 친구 2명과 함께 친엄마를 살해한 17세 여성 발레사 로빈슨 사건은 이 전략이 적중한 사례다. 검찰은 발레사를 주범으로 지목했지만 변호인은 남자 친구들의 꾐에 빠진 ‘청순가련 소녀’로 가공하는 데 성공했다. 배심원 앞에 선 발레사는 흰색 스웨터에 무릎을 덮는 밤색 주름치마를 매치했고 발끝이 둥근 구두를 신었다. 그는 어깨까지 내려온 머리카락을 자주 쓸어 넘기며 귀를 살짝 드러냈다. 발레사의 외할머니는 “욕을 입에 달고 살던 손녀가 딴사람이 됐다”고 말했다. 공범들에겐 각각 사형과 25년형이 선고됐지만 발레사는 13년형의 ‘선처’를 받았다.

▷1997년 한보그룹 정태수 회장이 ‘휠체어 출두’를 선보인 이후 휠체어와 환자복은 검찰에 불려가는 재벌 총수들의 ‘드레스 코드’가 됐다. 1월 태광그룹 이선애 상무가 출두할 땐 간이침대가 등장했다. 학력 위조로 물의를 빚고 잠적했던 신정아 씨는 평소 화려한 스타일 대신에 검은 뿔테 안경에 회색 티셔츠 차림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신창원은 누가 봐도 탈옥수 같은 현란한 무늬의 쫄티를 입은 채 검거돼 적어도 옷차림에선 반(反)사회성을 숨기지 않았다.

▷판사들은 법정에서 다양한 연기자를 만난다. 굳이 틀니를 빼고 웅얼웅얼 최후진술을 하는 기업 회장, 갑자기 졸도했다가 구급대원이 오면 생사를 넘나든 표정으로 깨어나는 사기범, 고개를 푹 숙인 채 날선 눈빛을 주고받는 조폭들. 피고인의 ‘법정 연기’에 법관의 판단이 흔들려선 안 될 것이다.

신광영 사회부 기자 ne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