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재동 경제부 기자
선거를 통해 권력의 정상에 오른 정치 지도자는 국민의 인기가 높은 집권 초기에는 과감한 정책을 택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자기 색깔을 지우면서 어정쩡한 태도를 취하거나 의욕을 상실하는 경우가 많다. 한국의 역대 지도자들도 대체로 그랬다. 하지만 대처는 집권 11년 내내 자신의 철학에 따라 정치를 했고 오히려 어려움에 직면할수록 더 강인해졌다. 정치적 견해가 달라 대처를 싫어하면서도 한편으론 인정하고, 또 결국 존경하는 사람이 여전히 많은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1970년대 영국은 복지를 위한 적자재정과 전투적 노조 때문에 구제금융을 받고 인플레이션이 연간 20%를 넘을 정도로 경제가 총체적 난국에 빠졌다. 총리가 된 대처는 통화 공급과 고용 창출 등 정부의 역할을 최소화하는 방식으로 대수술에 들어갔다. 충격요법 때문에 일시적으로 실업자가 300만 명에 육박하고 기업이 도산하는 등 혼란이 일어났다. 지지율은 순식간에 20% 아래로 떨어졌다.
영화에서는 그가 “비록 지금은 사람들이 싫어하더라도 후손은 고마워할 것”이라고 중얼거리는 장면이 나온다. 마치 요즘 한국의 정치인들에게 하는 말 같다. 국가장래를 위한 비전을 제시하고 국민을 설득하기는커녕 한순간의 인기를 위해 이 나라가 힘들게 쌓아온 성과와 핵심 가치마저 허물고 있는 정치인들 말이다.
이명박 대통령은 집권 첫해에 일부 반대세력이 기획한 광우병 시위에 놀라 청와대 뒷동산에 올라가 눈물을 흘렸다. 상대 후보와 약 500만 표 차의 압도적 프리미엄을 갖고 출범한 이 정부는 그 후 내내 안티 세력에 조롱당하고 끌려다녔다. 정부와 한배를 탄 여당은 일부 야당의 무리한 포퓰리즘 주장에 정면 대응하기는커녕 자존심도 내팽개치고 그들의 공약을 베끼고 있다. 혹시 이런 것을 두고 정부 여당이 타협의 정치요, 유연한 대응이라고 가슴을 쓸어내리는 것은 아닌지 걱정스럽다.
박재완 기획재정부 장관은 최근 외신에서 “포퓰리즘에 맞설 배짱을 가진 정직한 한국 관료”라는 이례적 찬사를 받았다. 우리나라 고위 관료가 이런 평가를 받는 것은 고무적이지만 그는 어차피 이 정부의 임기가 끝나면 물러난다. 임명직 공무원이 아닌 자신의 표를 건 정치인, 자신의 운명을 건 지도자의 용기가 그립다. 대처처럼 당장의 인기나 여론에 연연하지 않고 나라의 앞날을 위해 소신을 지켜내 국민에게 인정받고 역사에 기록될 그런 지도자는 정말 한국에는 없나.
유재동 경제부 기자 jarret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