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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2/이 한줄]끝난 걸까, 아직 시작도 안했어…

입력 | 2012-02-11 03:00:00


《“아직 시작도 안 했어.” -‘키즈 리턴’(1996년)
소리가 나는 그림을 이따금 만난다. 손등을 물어뜯어 짓눌러 끄려 하는데 귓등 언저리로 새어나와 버린 흐느낌 같은 소리다. 언저리 발소리 숨소리가 묘하게 잦아든다.

감상은 행복하다. 하지만 매번 드는 생각은 그 화가의 가족으로 태어나지 않아 다행이라는 것. 작업실 지척에서 같은 시간을 살았다면 오다가다 행여 마주치지 않으려 애썼을 거다.

기타노 다케시의 영화들. 그런 소리를 낸다.

징글징글하게 팔팔 끓여낸 핏물의 질감에 매혹돼 에세이 몇 권도 사들여 읽었다. 빠져들수록, 그와 직접 알고 지내는 사이가 아니어서 참말 다행이라 생각했다.

자기혐오. 인간과 그들의 집단행동에 대한 철저한 불신. 냉소 한 조각도 던지지 않는 강경한 포기.

그리고 그런 재료들로 단단히 붙들어 싸맸는데도 붕대를 헤치고 나온 핏줄기처럼 빨갛게 배어나오는, 다 버려 내지 못한 안쓰러움.

연출작 리스트를 책으로 묶어 영화 각각에 한 챕터씩 맡긴다면 ‘키즈 리턴’은 큰 주제를 벗어나 쉬어가는 페이지쯤일 거다. 안쓰러움을 주재료로 쓴 기타노 다케시라니. 당황스럽다.

교복 입은 소년이 교복 입은 소년을 만난다. 여느 수컷들이 딱히 까닭 없이 마주치자마자 멍청하게 뿔을 부딪듯 재빠르게 우열을 가늠한다. 어깨에 손을 얹고 웃는 쪽과 어깨를 내주고 웃는 쪽이 정해진다. 자전거 페달을 밟는 부하 신지와 뒷자리에 앉아 싱글싱글 흥얼거리는 대장 마사루. 교대는 없다. 남자들은 코흘리개도 계급을 갈라낸다. 다 제쳐두고 일단 그것부터 정하도록 프로그램 된 것처럼.

온 사방에 내 세상이다 건들건들 시비 걸고 다니다가 권투선수에게 잘못 걸려 꼴사납게 두들겨 맞은 마사루. ‘너도 할 수 있다’고 부추기며 얌전한 신지의 손을 끌고 가 글러브를 끼운다. 혼자 훈련하면 심심하기 때문일 뿐이었는데. 첫 스파링에서 다운돼 뻗은 쪽은 마사루다.

그날부터 신지는 혼자 자전거를 탄다. 본격적으로 권투를 배워 정식 시합에 나선다. 뒷자리에 올라탈 수 없게 된 마사루는 야쿠자에 투신한다.

어렵사리 찾은 적성대로 둘 모두 나름의 짤막한 승승장구를 경험하고, 당연한 듯 나란히 추락해 쓰레기통에 처박힌다. 선전을 거듭하는 후배 복서를 못마땅하게 여긴 퇴물 선배가 권한 술에 절어서. 하늘 높은 줄 모른 채 패기만 믿고 날뛰는 풋내기에게 자연히 겨눠진 중간보스의 칼끝에 저며져서.

유망주 신지의 등장으로 시끌벅적했던 체육관은 새로운 유망주의 등장으로 여전히 시끌벅적하다. 굳은 의리를 저버린 권력다툼에 휘말렸던 조직은 새로운 의리를 더 굳게 형성해 융성한다. 두 사람의 자취 따위. 걸레질 한 번으로 깔끔하게 스윽 지워지는 마른 땟물 방울.

교복 벗은 두 소년이 다시 만난다. 자전거는 한 대다. 뿔을 부딪을 이유가 없다. 옛 부하가 페달을 밟고 옛 대장이 뒤에 쭈그려 앉는다.

텅 빈 학교 운동장. 흥얼흥얼.

“끝난 걸까.”

“아직 시작도 안 했어.”

처음 봤을 때. 스물여섯 살이었다. 대학로 극장 문을 나서면서 생각했다. 일찌감치 인생 종쳐 다 끝난 놈들이 안쓰러운 헛소리를 한다고.

12년이 흘렀다. 나는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까.

krag06@gmail.com
krag 기자. 아직 시작도 안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