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형주 사회부 기자
400여 년 전 세워진 이 마을은 이씨가 모여 사는 집성촌이다. 경로당 옆에는 마을 전통을 설명하는 조형물도 세워져 있었다. 주민들은 해마다 설 명절이 되면 함께 모여 음식을 먹으며 경로당에서 노래자랑을 할 정도로 공동체 의식이 강했다. 한 주민은 “10년 전부터 설날 고향에 온 젊은이들이 경로당에서 노인들께 장기를 보여주는 노래자랑을 하며 화합을 다졌다”고 전했다. 하지만 올해는 이런 전통이 깨지는 안타까운 명절이 됐다.
사건의 발단은 5일 오후 5시 반경 경로당에서 찬밥으로 만든 비빔밥을 먹던 정모 씨(72·여) 등 주민 6명이 갑자기 구토를 하며 실신해 병원에 실려 간 뒤 정 씨가 결국 숨지면서부터다. 이모 씨(55) 등 주민 5명은 병원 치료를 받았다. 피해 주민들은 사건 직후 병실에서 “비빔밥에 독극물이 투입될 리 없고 행여 뭔가 들어갔다고 하더라도 실수였을 것”이라며 서로를 감쌌다.
경찰은 설날에도 정 씨의 유족 등을 상대로 탐문수사를 벌였다. 정 씨 유족은 “마을 노인들이 놀라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수사해 달라”고 요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다른 피해자들은 ‘사건이 빨리 해결됐으면 좋겠다’는 뜻을 전했다.
경찰은 당혹해하는 주민 입장을 감안해 최대한 신속히 수사를 마무리할 계획이다. 경찰 관계자는 “공동체 의식이 강한 집성촌이라는 마을 특성상 상당수 주민들이 ‘쉬쉬’하는 분위기”라고 전했다.
경찰 추정대로 누군가가 밥에 농약을 넣었다는 수사 결과가 내려질 경우 마을 주민들이 우려하는 대로 마을 공동체가 당분간 깨질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유구한 공동체 의식을 지닌 농촌마을 전통을 영원히 이어가려면 불편한 진실을 밝혀내고 숨은 상처를 치유해야 하지 않을까. 그래야만 10년간 이어진 마을의 설날 노래자랑 화합잔치도 되살아날 것이다.―함평에서
이형주 사회부 기자 peneye09@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