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미석 전문기자
사람들 도움속에 올 한해 마무리
‘낯선 이의 친절을 경계하라’는 말이 익숙한 시대지만 지난달 이스탄불로 출장 갔을 때 우연히 목격한 상황은 내가 모르는 누군가가 나를 돕고 있다는 사실을 새삼 일깨워주었습니다. ‘절하고 싶다/저녁연기/자욱한 먼 마을’(고은의 ‘저녁 무렵’)이라며, 정겨운 풍경 앞에서몸을 낮춘 시인처럼 그때 ‘낯선 이의 친절’로 완성된 기적에 절하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마침 이런 생각을 행동으로 옮긴 ‘감사편지 프로젝트’로 인생 대역전을 이룬 미국의 존 크랠릭 판사의 실화를 접했습니다. 변호사로 개업한 사무실은 망해가고, 결혼생활은 파경에 이르고, 자식들과 멀어지는 파멸 직전 삶의 막장, 그는 어린 시절에 들었던 할아버지 말씀을 문득 떠올립니다. “네가 가지고 있는 것들에 감사하는 법을 배울 때까지 네가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할 것이다.” 그 순간, 상황이 좋든 나쁘든 항상 곁에 좋은 것들이 있었지만 단지 자신이 그 선물을 보지 못했을 뿐이란 깨달음을 얻고, 하루를 마칠 때면 감사의 손 편지를 써서 부치기 시작합니다.
편지라 했지만 진심을 담은 짧은 쪽지였습니다. 수취인은 가족과 동료, 아침마다 밝게 인사해준 커피숍 직원, 수임료 제때 보낸 의뢰인, 성실한 아파트 관리인까지 다양했죠. 감사할 소재를 찾기 힘든 날도 있었으나 마침내 꼬박꼬박 손으로 쓴 편지가 365통을 채우자 놀라운 변화가 찾아옵니다. 사람과 인생을 바라보는 시각을 바꾸면서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고 꿈꾸던 판사직도 얻은 겁니다.
그를 닮고자 나만의 감사편지를 생각해 봤습니다. 다른 사람과 달리 내 흰머리가 멋지다고 칭찬해준 미용실 언니, 만성 가뭄에 시달렸던 사무실 화분에 때맞춰 ‘단비’를 내려준 청소 아주머니 등. 하염없이 길어지는 명단에 “그냥 말로 해야겠다”고 시작도 하기 전에 게으름을 피웁니다.
‘마음의 빚’ 진 가족-이웃에 감사
‘사과나무 한 그루가 내게 말했다./오랜 세월 지나가도 그 목소리는/내 귀에 깊이 남아 자주 생각난다./-나는 너무 많은 것을 그냥 받았다./땅은 내게 많은 것을 그냥 주었다./봄에는 젊고 싱싱하게 힘을 주었고/여름에는 엄청난 꽃과 향기의 춤,/밤낮없는 환상의 축제를 즐겼다./이제 가지에 달린 열매를 너에게 준다./남에게 줄 수 있는 이 기쁨도 그냥 받은 것,/땅에서, 하늘에서, 주위의 모두에게서/나는 너무 많은 것을 그냥 받았다.’(마종기의 ‘과수원에서’) 참, 독자 여러분은 올해 누구에게 기대고 사셨는지요?
고미석 전문기자 mskoh119@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