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숙선은 자신에게 쓴 소리를 해주는 선생님이 계셔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는 다음 달 3일 향사 박귀희 선생 추모공연을 선생의 고향 경북 칠곡군에서 연다. 그가 가르치는 서울 성북구 석관동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정에 섰다. 김재명 기자 base@donga.com
○ “오너라.”
남원 바닥에서는 “소리(판소리) 잘하고 재주 있다”는 말을 듣는 안숙선이었다. 인간문화재 급의 음악가들이 있었던 외가의 영향으로 그는 아홉 살 때부터 판소리를 하고, 민요에 단가(短歌)를 들으며 배웠다. 걸핏하면 선생님들은 교무실로 어린 그를 불러 노래를 부르게 했고, 산이나 내로 소풍을 가면 고분(古墳) 위나 냇가 큰 바위는 그의 무대가 됐다. 그러나 그는 마음에 썩 내키지는 않았다. “내성적인 데다가 말도 없었고, 튀는 행동을 하고 싶지 않았던 것 같아요.”
여성이 활보하는 시대도 아니었다. 더욱이 소리는 여염집 규수가 할 일이 아닌 것으로 여기던 때였다. 남원은 예향(藝鄕)이라고는 하지만 보수적인 곳이었다. 비를 피하러 처마 밑에 들어가 국악원에서 배운 소리를 복습하고 있을라치면 이상한 아이 취급을 당하거나, 고개를 흔들며 민요를 읊조려도 “거 몹쓸 가시내” 하는 말을 듣기 일쑤였다. 아버지를 여의고 홀로 살림을 떠맡은 어머니에게 도움이 될까 남원국악원 어른들을 따라 공연을 다니던 안숙선은 자신의 일에 확신을 가질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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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상경한 동생과 종로구 묘동에서 자취를 시작한 안숙선은 만정 선생을 어머니처럼 의지했다. 서울이라지만 국악인들이 무대에 설 곳은 많지 않았다. 선생은 싹수가 보이지만 마음을 잡지 못하던 그를 이곳저곳 무대에 세워주고, 어디를 갈 때는 꼭 데리고 다니며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려 애썼다.
만정 김소희 선생이 별세하기 한달여 전 제자 안숙선에게 보낸 당부의 편지. 안숙선 씨 제공
어느 날 만정 선생이 소리를 가르치다 말했다. “숙선아, 참 이상하다. 어떤 풀은 키우려 해도 밟히면 죽어버리는데 들풀은 밟아도 밟아도 죽지 않고 계속 살아난다. 그것이 우리 음악하고 비슷하다.” 선생이 절박하리만큼 우리 소리를 사람들 속에 뿌리내리게 하고 싶었던 것이라고 안숙선은 생각한다.
○ “쓰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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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생활 초기, 만정 선생 밑에서 공부하며 워커힐 무대를 설날 말고는 1년 내내 뛰고 있을 때 안숙선은 목에 탈이 났다. 소리 공부를 쉬어야 했다. 주위에서는 소리를 덜 지를 수 있는 가야금 병창을 해보라고 권유했다. 만정 선생에게 말씀드린 뒤 향사 선생의 연구소를 찾았다. 마침 일본에서 제자들을 가르치던 향사 선생은 얼마 후 귀국해 안숙선을 보곤 한마디 했다. “쓰겄다(쓸 만하다).”
향사 선생 보시기에 자신이 자질을 인정한 제자가 호텔 공연에 기량을 소모하는 게 안타까웠을 터다. 그러나 그러지 않고서는 안숙선이 가정을 꾸려나가기 힘든 상황이었다. 향사 선생은 행여 제자가 음악을 포기하지나 않을지 그의 집에 찾아가 시어머니와 남편을 붙잡고 “이 사람은 우리 음악을 짊어질 사람이다. 잘 돌봐 달라”고 부탁하기도 했고, 너무 연습에 몰입해 쇠약해진 제자를 위해 사람을 시켜 시장에서 장어를 사다 밤새 고아주기도 했다.
그러나 만정 선생과 마찬가지로 향사 선생도 제자의 몸가짐에는 봐주는 것이 없었다. 남 앞에 서는 사람은 공인(公人)이고, 공인은 옷 입고 밥 먹고 사람을 만날 때 각별히 주의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1970년대 중반이었다. 지금의 서울 신라호텔 영빈관은 당시 국빈(國賓)들의 숙소였다. 그곳에서 해외 수반을 위한 공연 리허설이 열렸다. 리틀엔젤스를 비롯해 나훈아 패티김 그리고 정상급 국악가들이 모였다. 안숙선이 당시 유행하던 파마를 하고 공연장에 나타나자 향사 선생이 뒷목을 부여잡으며 말했다. “저, 저 머리….” 험한 소리로 꾸중을 한 향사 선생은 그 자리에서 안숙선의 머리를 빗어 내려서 양 갈래로 땋아버렸다. 창피해서 살 수가 없었다.
“지금이야 다 이해하죠. 두 분 선생님이 많이 하시던 말씀이 ‘노래만 잘하면 무슨 소용이냐. 사람이 틀렸어’였어요. 사람이 먼저 되라는 것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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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이미 안숙선은 스타였다. 그에게는 ‘흥행 보증수표’라는 별명까지 생겼다. 안숙선도 자신의 소리를 들으며 ‘참, 좋다’는 생각이 들 만큼 기량과 인기가 함께 치솟았다. 1995년 3월경이었다. 병중의 만정 선생이 그에게 편지지 앞뒤에 쓴 글을 보냈다. 뒷장은 본인의 힘이 부쳐 다른 제자에게 불러 쓰게 한 것이었다.
‘내가 너를 건성으로 제자 삼아 봐온 것이 아니다. TV로 네가 ‘심청가’ 한 대목 하는 것을 봤다. 네가 실수한 걸 알아야 한다. 무대 위에서 되잖은 소리 지껄여서 남을 웃긴다는 것이 참으로 예술인이 아니다. 천(千) 사람이 좋다 해도 관중 속 한 사람이라도 ‘그건 아니다’ 하면 그 말이 옳을 것이다.’
그리고 한 달여, 만정 선생은 세상을 떠났다. 향사 선생이 가신 지 2년 만이었다. 그늘이 되고 담이 돼주었던 두 분이 돌아가시고 안숙선은 스스로 서기까지 힘든 시간을 보냈다. “제가 어려운 일에 처했을 때 길을 가르쳐 주고, 진심으로 제게 싫은 소리를 해줄 분이 안 계신 거지요.”
20년 가까이 우리 소리를 끌고 온 안숙선이 말했다. “스승 없이는 안 되겠어요. 지금도 저를 컨트롤하기가 어렵네요. 공부를 계속하고 싶은데….” 그는 언제나 학생이고 싶은가 보다.
민동용 기자 mind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