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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사회]神의 군대, 시간의 벽을 뚫고 나오다

입력 | 2011-07-16 03:00:00

◇십자군 이야기 1/시오노 나나미 지음·송태욱 옮김/348쪽·1만3800원·문학동네




《역사와 소설의 경계에서 방대한 드라마를 만들어내고, 천년 전 일을 어제 기억처럼 풀어내는 작가, 시오노 나나미. 독서가들 사이에서 ‘로마의 여인’으로 불려온 그가 귀환했다. 이번에는 로마 이후 예루살렘 성지를 되찾기 위해 200년간 치열한 전쟁을 벌였던 십자군의 이야기다. 십자군 전쟁의 서곡은 교황 우르바누스 2세의 연설이었다. 1095년 11월 프랑스의 클레르몽에서 십자군 전쟁을 선포하던 당시의 정확한 내용은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작가의 상상력은 우르바누스 2세의 연설을 실감나게 복원한다. “지금까지 푼돈이나 받고 하찮은 일을 하며 세월을 보내던 자도, 어제까지 도적이었던 자도 오늘 전사가 될 것이다. 그 땅으로 가서 이교도와 싸워라. 그들은 너희 형제를 죽이고 납치하고 파괴하고 있다. 동방을 향한 진군을 시작한다. 신이 그것을 바라신다.”》

‘신이 그것을 바라신다.’ 교황의 그 말은 11세기 서유럽 크리스찬들의 마음을 강하게 때린 한마디였다. 군사력이 없었던 교황에게 ‘성지 해방’의 슬로건은 수십만 십자군 군대를 움직이기에 적합한 승부수였다. 선임자였던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는 황제를 사흘 밤낮 눈 속에 세워둠으로써 교황의 권위를 과시했지만 결국 돌아온 것은 ‘황제의 반격’이었다. 이를 직접 경험한 우르바누스 2세로선 수십만 군을 동방에 보내 예루살렘을 무력 탈환함으로써 자신의 권위를 보여주려 했던 것이다. 작가는 이렇듯 교황의 연설을 복원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인간 우르바누스 2세의 섬세한 심리까지 복원했다.

프랑스 왕 루이 9세가 이끄는 제7차 십자군 원정을 1940년대에 프랑스 화가 귀스타브 도레가 그렸다. 도레의 삽화와 시오노 나나미의 설명이 함께 있는 책 ‘그림으로 보는 십자군 이야기’도 ‘십자군 이야기1’과 함께 출간됐다. 문학동네 제공

작가가 연출한 드라마는 ‘니케아 전투’에서 그 긴장감이 한껏 고조된다. 니케아는 십자군이 소아시아에서 예루살렘으로 진격하기 위해 처음 맞닥뜨려야 하는 튀르크인의 요새. 도시 전체를 둘러싸고 있는 6km의 긴 성벽을 사이에 놓고 야영하던 십자군 5만 명을 이슬람교도인 튀르크 기병 1만 명이 급습했다. 양쪽 합쳐 6000여 구의 시체가 성벽 근처를 뒤덮었다. 작가는 이보다 더 잔혹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십자군은 죽은 튀르크 병사 2000명의 머리를 잘라 니케아 성벽 안으로 던져 넣었다. 동료의 머리가 하늘에서 우수수 떨어질 때 성을 방어하는 튀르크 병사들의 심정은 공포 그 자체였을 것이다. 십자군은 어렵지 않게 니케아 성을 정복했다.

다소 지루할 수 있는 전쟁 이야기를 중간 중간 작가만의 색다른 ‘관심사’로 풀어냈다. 이를테면 십자군에 참여한 ‘보에몬드’라는 제후의 외모에 대한 부분. “결혼 상대가 아니라면 사회의 통념에서 벗어나 있고 형편없는 인간일지라도 미워할 수 없는 남자에게 끌리는 법이다. 위험하다는 걸 알면서도 모험에 나서는 남자는 여자에게 나이와 종교의 차이를 넘어 그저 ‘매력 있는 남자’로만 보일 뿐이다.” 작가의 설명에 따르면 보에몬드는 금발의 탄탄한 몸매로 이슬람교도 여자들에게까지 인기가 있었다고 한다.

이처럼 매력적인 제후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해 예루살렘으로 진격하는 그 이야기 역시 매력적이지 않으랴. 자칫 딱딱할 수 있는 역사를 전작 ‘로마인 이야기’처럼 흥미진진한 ‘이야기’로 풀어냈다. 십자군 이야기 시리즈는 총 3권 출간될 예정이다.

이 책은 한국 출판계에서 선인세 경쟁이 붙어 출판가의 화제가 되기도 했다. 전작 로마인 이야기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고가인 것으로 알려졌다. 출판계에서 돌았던 ‘15억 원 설’에 대해 문학동네 측은 “두 자리는 넘지 않는다”고 밝혔다. 물론 ‘십자군 이야기’도 ‘로마인 이야기’만큼 훌륭하다. 단, 딱 ‘그만큼’이다.

김진 기자 holyjji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