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대 중반 인문학 열풍이 불면서 고전을 찾는 독자의 수요가 꾸준히 늘었다. 출판계에서도 고전이나 방대한 분량의 대작을 완역해 출판하는 분위기가 형성됐다.
미국의 저명한 문명사학자 윌 듀런트(1885∼1981)가 50년에 걸쳐 쓴 대작 ‘문명 이야기’(민음사) 1차분이 국내에서 처음으로 완역돼 출간됐다. 이 책은 고대 인류 문명의 기원부터 시작해 1930년대 인도 중국 일본에 이르기까지 1만 년의 동서양 역사를 담고 있다. 총 11부 중 1부 ‘동양문명’과 2부 ‘그리스문명’, 5부 ‘르네상스’(각 부 2권·600쪽 내외)가 먼저 선보였다.
‘국내 처음 완역 출간’을 전면에 내세운 책이 최근 부쩍 늘었다. 특히 ‘문명 이야기’처럼 방대한 분량의 대작이나 동서양 고전을 완역하는 일이 많아졌다. 과거 중역(重譯·한 언어로 번역된 글을 다시 다른 언어로 번역)했거나 발췌 또는 요약해 번역했던 고전을 다시 완역하는 것이다.
그리스 로마 고전 번역가 천병희 단국대 명예교수의 대표작인 ‘일리아스’(숲), ‘오뒷세이아’(숲)는 각각 1만 부 이상 팔렸고 신작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숲)도 출간된 지 보름 만에 1000부 이상 팔리는 등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2010년 초 완역 출간된 에드워드 기번의 ‘로마제국 쇠망사’(총 6권·민음사)도 지금까지 1만 질 이상 판매됐다.
출판사로서도 고전이나 대작의 완역은 도전해보고 싶은 일이다. 서울대 인문학연구원과 함께 ‘문명텍스트’ 총서를 펴낸 한길사의 박희진 편집장은 “고전은 오랜 준비가 필요하고 번역도 쉽지 않지만 한 번 번역해놓으면 오랫동안 꾸준히 팔리는 아이템이다. 저작권료도 없는 데다 출판사의 명예도 높일 수 있다”고 강조했다. 문명텍스트 총서는 동서양 고전을 완역해 펴낸 시리즈물로 앞으로 10년 동안 총 100권의 책을 낼 예정이다.
고전의 완역작업은 해당 분야 전공자 너덧 명이 팀을 이뤄 진행하는 경우가 많다. 원전의 양이 방대하기도 하지만 해석에 어려움이 많아 팀원들이 서로 토론한 후 결과를 도출하기 때문이다. 중국 고전 역사서인 ‘한서’를 번역하고 있는 윤지산 석하고전연구소장은 “역사와 문학, 철학을 전공한 사람들이 모여 번역에 참여한다. ‘한서’의 경우 천문학도 다루고 있어 이와 관련된 전공자까지도 필요한 상황”이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고전 완역은 여전히 걸음마 단계다. 무엇보다 번역자들이 대부분 대학에서 강의를 병행하다 보니 번역에 집중할 수 없는 점이 가장 큰 문제로 꼽힌다. 천병희 교수가 2004년부터 그리스 로마 고전을 20편 이상 완역할 수 있었던 것도 정년퇴직 후 번역에만 몰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직에 있는 대다수 번역자는 그럴 만한 여건이 되지 않는다고 토로했다. 윤 소장 역시 팀을 이뤄 중국 고전인 소동파 전집을 번역하다 중단한 바 있다. 교수나 연구원의 업적을 평가할 때도 번역에 대한 가치를 지금보다 크게 인정해야 한다고 번역자들은 입을 모았다.
이지은 기자 smile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