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보 이종훈 특파원 르포
이종훈 특파원
카페에서 만난 “아버지가 의사”라고 밝힌 대학생 마리오 씨(23)는 “아테네 중심가에 살지만 주말이면 친구들과 이곳에 와서 함께 즐긴다”며 “경제위기라는 것을 느끼지 못한다”고 했다. 옆 테이블에 앉은 미네로스 씨(66) 부부는 한 달에 받는 연금이 둘이 합쳐 대략 3600유로(약 560만 원)라고 했다. 남편은 해운회사에서, 부인은 제약회사에서 일하다가 퇴직했다고 한다. 미네로스 씨는 경제위기에 대해 “정치인과 공무원이 잘못한 결과다. 하지만 내 생활에는 어려움이 없어 얼마나 큰 문제인지 잘 모르겠다”고 했다.
인구가 1100만 명에 불과한 그리스는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3만 달러에 가까운 사실상 선진국. 하지만 사회 밑바닥에서는 과연 국가라는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고 있나 의심이 들 정도로 상식에서 벗어난 불가사의한 일들이 많다. 대표적인 게 계층과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사회 전반에 뿌리 깊게 퍼져 있는 탈세와 뇌물이다.
20년 가까이 아테네에 거주하는 교민 김모 씨는 “지난해 말 이웃집 친구가 임신을 해서 병원에 갔더니 의사가 ‘특별히 잘 돌보아주겠다’며 웃돈을 요구했다. 그리스 병원에서는 의사가 노골적으로 환자에게 ‘별도의 돈’을 요구하는 일이 종종 있다”며 “이처럼 일상생활 도처에서 뇌물이 판을 치니 그리스는 돈과 인맥이 최고라는 인식이 팽배하다”고 말했다.
그리스의 불법 탈세액이 연간 300억 유로(약 47조 원)에 이른다는 추정도 있다. 이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그리스가 지난해 유럽연합(EU)과 국제통화기금(IMF)에서 받은 구제금융(1100억 유로)의 4분의 1이 넘는 규모다. 실제로 지난해 탈세 문제로 국가와 회사, 또는 민간인이 벌이고 있는 소송이 수만 건에 이른다는 유럽언론들의 보도도 있었다.
이종훈 특파원
해운업체에 대한 법인세 부과가 아직도 이뤄지지 않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 해운업은 그리스 GDP의 10%를 차지하는 경제의 주동력이지만 그리스에서 유일하게 법인세를 내지 않는 업종. 한때 정부가 과세를 추진하기도 했으나 “그리스를 떠나겠다”고 협박한 해운업체들과 관련 정치인 입김에 가로 막혔다.
KOTRA 윤강덕 아테네센터장은 “역사적으로 도시국가로 출발한 그리스는 로마의 지배를 1000년, 터키의 지배를 400년 받으며 국민들의 국가관이 희박해졌다는 학계의 분석이 있다. 그보다 더 심각한 것은 오랜 기간 포퓰리즘에 길들여져 ‘나만 좋으면 상관없다’는 식의 극도의 이기주의와 개인주의가 만연해 있다는 점”이라며 “국민 스스로 자립 의지가 없는데 누가 그리스를 돕겠느냐”고 반문했다.
이종훈 특파원 taylor55@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