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싼 와인은 대부분 저마다의 스토리가 있게 마련이다. 특히 지적 호기심이 많은 이들에게 이만큼 흥미로운 아이템도 없다. ‘비싼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라는 말은 와인 세계에서도 그대로 들어맞는다. 작업자의 생명을 여럿 앗아 갔을 정도로 경사가 심한 포도밭에서 수확한 포도로 만들었거나, 새 오크통을 한 번도 모자라 두 번이나 사용하는 등 가격이 비싼 와인 뒤에는 수긍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럿 숨어있게 마련이다.
비싼 와인의 순기능이 있다면, 별다른 노력을 안 해도 와인 이름, 함께 마신 사람, 장소 등이 절로 기억된다는 점이다. 맛은 차치하고라도 사람들은 비싼 와인의 라벨에 한 번이라도 더 눈길을 보내고, 보다 신중하게 맛을 음미하려고 정신을 집중하기 때문이다.
‘와인은 비싸다’라는 공식은 늘 성립되는 것은 아니지만 ‘비싼 와인이 대체로 맛있다’는 사실에는 수긍하는 이가 많다. 필자가 비싼 와인이 좋다고 답하는 또 다른 이유다. 비싼 와인은 무엇보다 마시는 이의 설렘의 폭을 증폭시켜 좋다. 평소 자주 마시는 값싼 와인도 새로운 빈티지를 맛보기 전에는 그 맛이 어떨지 궁금하고 설레는데, 하물며 말로만 들어왔던 고가의 와인은 오죽할까.
사람에 따라 ‘비싼 와인’이라고 부르는 가격 기준은 다르지만, 어떤 사람도 자신이 비싼 와인이라 여기는 와인을 아무 때나 내놓지도, 또 아무하고나 마시지도 않는다. 몇 번이고 들었다 놓았다를 반복하는 심사숙고 끝에 고른 와인은 그 와인을 구입하던 그날의 내 모습까지 고스란히 품고 있다. 그때를 자연스레 기억하게 만드는 미래의 행복한 순간은 또 다른 좋은 추억을 만들 가능성이 크다.
김혜주 와인칼럼니스트
샤토 질레트, 크렘 드 테트 1955
1990년산 이후 빈티지가 출시되지 않고 있어서 샤토가 없어진 것 아닌가 궁금해하는 이가 많은 와인이다. 샤토는 여전히 건재하고 1990년산은 이 샤토가 출시한 가장 최근의 빈티지다. 와인이 생산되는 보르도 소테른은 물론 전 세계 어디에서도 이 와인처럼 20년(탱크에서 18년, 병입 후 다시 최소 3년) 이상 숙성시킨 후 내놓는 사례는 없다. 특히 이 와인은 29년을 숙성시켜서 1984년에야 비로소 출시했다. 오너의 사진만 봐도 머리가 절로 숙여질 정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