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세 칼뱅 “자기개혁 멈춘 교회는 타락”
《독일의 마르틴 루터(1483∼1546)로 상징되는 종교개혁의 또 다른 무대는 지금의 스위스다. 제네바를 중심으로 활동한 장 칼뱅(1509∼1564)과 취리히의 울리히 츠빙글리(1484∼1531)가 그 주인공이다.》
기욤 파렐, 장 칼뱅, 테오도뤼스 베자, 존 녹스(왼쪽부터)의 순으로 서 있는 스위스 제네바 바스티옹 공원의 종교개혁 기념비. 이들은 제네바를 중심으로 종교개혁을 주도했으며 특히 칼뱅이 설립한 제네바 아카데미는 종교개혁을 전파하는 사관학교가 됐다. 제네바=김갑식 기자 dunanworld@donga.com
○ “교회는 언제나 개혁되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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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네바 바스티옹 공원의 종교개혁 기념비를 찾았다. 파렐, 칼뱅, 테오도뤼스 베자, 존 녹스의 순으로 이 도시의 종교개혁을 주도했던 인물들의 거대한 부조가 있다. 칼뱅은 날카로워 보이는 외모만큼이나 신앙에서도 타협이 없는 인물이었다.
그의 예정론은 구원뿐 아니라 멸망까지 하나님의 의지에 달려 있다는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에서 출발한다. 면죄부 판매 등으로 극심한 타락상을 보인 가톨릭교회는 그에게 철저한 개혁 대상이었다.
스위스 취리히 시 리마트 강가에 있는 울리히 츠빙글리의 동상. 군목으로 여러 차례 전투에 참전했던 그의 동상에는 성경 대신 긴 칼이 들려 있다.
취재를 동행한 독일 슈발바흐성령교회 신국일 목사는 “루터로부터 시작된 종교개혁은 칼뱅에 의해 체계화되고 실천됐다”며 “종교개혁의 의미는 시대를 막론하고 되새겨야 할 가치인데 칼뱅의 정신을 잇고 있다는 한국 교회가 500년 뒤 세속적인 성공 외에 무엇을 내놓을 수 있을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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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리히 시의 리마트 강가에 있는 츠빙글리의 동상을 이튿날 찾았다. 루터보다 1년 늦게 태어난 그는 종교개혁을 이끌면서 종군목사로 참전했다. 그래서 그의 동상은 성경 대신 큰 칼을 쥐고 있다. 스위스는 지금은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6만 달러가 넘는 부국이지만 츠빙글리 당시에는 가난에 찌든 지역이었다. 가장 확실한 돈벌이는 용병이었다.
1518년 취리히 시의 목회자로 선출된 츠빙글리는 타락한 종교로부터 억압받는 인간을 구원하겠다는 생각으로 교회 갱신과 사회개혁운동을 일으켰다. 개혁의 시초는 용병 금지였다. 그 대신 십일조 헌금과 세율을 인하해 서민의 부담을 줄였다. 교회의 성화와 성상을 철폐했고 예배도 의식 대신 설교 중심으로 바꿨다. 루터와는 성만찬 논쟁 때문에 1529년 갈라선다. 1531년 가톨릭 도시들의 반발로 전쟁이 벌어지자 군목으로 참전한 그는 카펠 전투에서 전사했다.
루터에서 칼뱅까지 종교개혁의 메시지는 무엇일까. 가톨릭은 이후 뼈를 깎는 개혁을 시작했다. 예수회는 적극적인 선교와 청빈의 삶으로 가톨릭의 새로운 수호자가 됐고, 가톨릭의 개혁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58∼1963년)를 넘어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다.
칼뱅의 말처럼 교회는 언제나 개혁되어야 하며, 이를 멈추면 낡은 수레바퀴에 깔린다는 것을 역사는 보여준다. 심지어 종교가 세속까지 통치해야 한다는 신앙관을 반복한 칼뱅도 예외가 아니었다. 권위와 세속적인 성공이 아니라 자신을 낮춘 세상과의 소통이야말로 한국 개신교계에 절실한 이 시대의 소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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