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평인 논설위원
나의 상상 뮤지컬 ‘김정일’에서 그는 늘 인민복을 입고 다닌다. 의상이 단순하긴 하지만 개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미국 정찰위성을 피해 심야에서 새벽에 걸쳐 활동하는 야행성 생활습관, 어릴 적 생모를 잃고 계모 슬하에서 자란 애정결핍과 이로 인한 여성 집착, 수령의 후계자로 성장한 사람의 무모함과 잔인함…. 여러모로 극적인 캐릭터의 소유자다.
1막은 1994년 김일성의 사망으로 1인자의 자리에 올라 건강이 나빠지기 전까지의 김정일을 다룬다. ‘친애하는 김정일 지도자 동지’를 위한 북한 여군들의 칼춤 공연으로 막이 오른다. 칼춤은 집체극 아리랑에 나오는 안무를 그대로 가져와도 인상적일 것이다. 운동권 통일 가요의 선율이 울려 퍼지고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이 정상회담을 갖는다. 두 사람 뒤로 노벨평화상 수상과 은밀한 지하핵실험의 장면이 각자의 숨겨진 마음을 상징하듯 프로젝트 화면으로 투사돼 펼쳐진다.
3막에서는 2005년 이후의 무절제한 생활과 지병으로 핼쑥해진 노인 김정일이 등장한다. 핵무기와 장거리 미사일 개발을 위해 선군정치로 나아가는 과정이 북한 군가의 엄숙한 선율에 실려 묘사된다. 군부와 측근을 향한 통 큰 선물 공세 장면도 들어간다. 클라이맥스는 기쁨조를 동원한 심야 파티다. 뇌출혈로 쓰러진 뒤 김정일이 느끼는 초조함이 반라(半裸)에 가까운 옷을 입은 미희들의 춤과 날카로운 대조를 이룬다. 술에 취한 김정일의 ‘옷 벗어’라는 외침이 들리고 갑자기 조명이 꺼진다.
그 다음은 3대 세습을 허가받기 위해 창춘(長春)으로 후진타오(胡錦濤) 중국 국가주석을 만나러 가는 장면이다. 김정일은 관객을 등지고 서서 전용열차의 차창 밖으로 펼쳐진 만주벌판을 바라본다. 온갖 상념이 그의 머리를 스쳐간다. 자신은 20년이 넘는 오랜 준비 과정을 거쳐 지도자 자리에 올랐는데 아들 정은에게 그런 준비 시간을 주지 못했다. 어설픈 정은을 대형(大兄) 중국이 지켜주길 바랄 뿐이다.
김정일의 최후를 다루게 될 마지막 장면은 고민을 많이 해봐야 할 것 같다. 독재에 저항한 봉기가 일어나 김씨 일가는 망명하고 뮤지컬 ‘레미제라블’ 같은 승리의 합창으로 마무리되면 좋겠지만 3대 세습의 안착으로 끝난다면 최악의 시나리오다. 셰익스피어의 ‘맥베스’처럼 악한이 징벌을 받지 않고 극이 끝나버리는 뮤지컬을 어떤 관객이 보러 올 것인가.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