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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지강국이 앓고 있다]더딘 개혁에 재정위기 겪는 이탈리아

입력 | 2011-01-27 03:00:00

‘苦부담 高복지’ 월급40% 세금 떼 노인에 공짜 바캉스




로마 15구에서 운영하는 ‘안토니오 치리칠로’ 노인회관에는 동네 노인들이 오전 10시부터 몰려들었다. 영어 스페인어 역사 등 인문학 수업에서부터 춤 노래 강습까지 다양한 프로그램을 시간대별로 마련해 놓았는데 하루 150명 정도가 찾는다.

55세 이상이면 누구나 무료로 이용할 수 있는 이런 노인회관이 로마에만 10여 곳이 더 있다. 기자가 25일 찾아갔을 때 만난 에지오 바이오코 씨(71)는 “하루 종일 여기서 지낸다. 작년 여름에는 구에서 단체로 바캉스를 보내줘 수영장이 딸린 호텔에서 2주나 묵었다”고 자랑했다. 구는 치매 노인을 위한 요양원과 병원 픽업 서비스도 무료로 제공한다.

이탈리아는 소득의 40% 이상을 세금으로 내고 은퇴 후엔 연금을 비롯한 혜택으로 돌려받는 전형적인 고부담-고복지 국가. 모든 국민이 주치의가 있고 응급실과 국영 종합병원에서 무료 혹은 최소한의 비용으로 진료를 받는다.

○ “낸 만큼 돌려받는다는 믿음 사라져”


이탈리아는 포르투갈 그리스 스페인과 함께 2008년 심각한 재정적자를 겪은 나라를 일컫는 ‘PIGS’ 국가로 불렸다. 하지만 이곳 노인들은 경제위기에서 비켜간 듯했다. 거리에서 만난 많은 노인은 “현재의 삶에 별 불만이 없다”고 말했다.

재정위기에도 행복한 노년? 25일 이탈리아 로마의 안토니오 치리칠로 노인회관에서 카드게임을 즐기는 지역 노인들. 이들은 “정부 지원이 대체로 만족스럽다”고 했다. 그러나 회관 밖에서 만난 이탈리아 청년들은 “우리는 그렇게 살지 못할 것”이라며 불만을 드러냈다. 로마=정혜진 기자 hyejin@donga.com

55세가 되기 전에 은퇴하면서 5년 동안 받은 세전 임금의 80%를 현금으로 주던 연금 체제는 사라졌다. 1990년부터 2008년까지 네 차례에 걸쳐 조금씩 개혁한 결과다. 하지만 혜택은 여전히 많다. 남성은 65세, 여성은 60세에 은퇴하면 직전 평균임금의 70%를 연금으로 받는다. 35년 동안 컴퓨터회사에 근무했다는 마리오 보티첼리 씨(70)는 “한 달에 1600유로(약 244만8000원)를 연금으로 받아 생활하는 데 부족함이 없다”고 말했다.

은퇴자에게는 달갑지만 젊은 세대는 사정이 다르다. 연금제도를 근로연령층이 떠받쳐야 하기 때문이다. 젊은 세대는 훗날의 연금을 걱정하기는커녕 당장의 일자리를 고민해야 한다. 방만한 복지 재정으로 경제성장률이 떨어지고 과도한 세금 부담을 못 이긴 기업이 이탈리아를 떠나기 때문이다.

로마대에서 만난 알렉산드라 반자 씨(21·엔지니어링학과 3년)는 “안정적으로 직장에 다니다가 은퇴해 꼬박꼬박 연금을 받아 생활하는 것은 이미 30∼40년 전에 끝났다. 이제는 2년 계약직을 찾기도 힘들다”고 말했다.

경제학과 1학년 페데리코 아멘돌라 씨(21)는 “요즘 누군가가 번듯한 곳에 취업했다고 하면 키 코노스코(chi conosco)라고 묻는다”고 했다. 누구 아는 사람이 있느냐는 뜻. 취업자를 찾기가 그만큼 어려움을 보여준다. 그는 “낙하산 없이는 취업하기 힘들다”는 말도 했다. 옆에 있던 조르조 비아소토 씨(19)는 “번듯하게 대학을 졸업하고는 한 달에 400유로(약 61만2000원)를 받는 콜센터 직원으로 취업하는 선배도 봤다”고 거들었다.

직장인 역시 불만이 많다. 통신회사에서 일하는 줄리아노 만치니 씨(40)는 “연봉 5만 유로에서 2만 유로를 세금으로 내고 나면 집 대출금과 두 아이의 양육비를 대는 것도 빠듯하다”며 “소득을 줄여 신고하는 방법으로 세금을 거의 안 내는 자영업자는 저소득자로 분류돼 정부로부터 무상의료 무상급식 혜택을 받는다”며 못마땅해했다.

아트디렉터인 스테파니아 두바 씨(40·여)는 “이탈리아에서 엄청난 땅과 건물을 소유하고 있는 바티칸과 자영업자는 현 정권의 지지기반이라 정치인이 이들로부터 세금을 걷는 일에 소극적이다. 낸 만큼 돌려받는다는 신뢰는 무너진 지 오래”라고 비판했다.

○ 고령화 초스피드, 개혁은 지지부진

의료 혜택은 이탈리아가 자랑하는 또 다른 복지시스템. 구멍은 여기서도 생겼다. 로마의 3대 국립병원 중 하나인 산 카밀로 병원 대기실에 가니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응급실에 누운 50여 명 중 상당수는 별다른 증상 없이 오래 입원한 환자였다.

경제위기로 소형 국립병원이 문을 닫자 남아있는 병원에서 진료를 받으려는 환자가 몰리면서 기다리는 시간이 점점 길어진다고 한다. 조반니 조바니니 씨(37)는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오른쪽 어깨가 쑤셔서 왔는데 한 달이나 기다려야 한다고 해서 개인병원으로 가는 길”이라며 “정부는 이럴 거면 그 많은 돈을 왜 의료세금으로 걷어갔냐”고 말했다.

국민이 내는 세금은 줄지 않았음에도 복지의 질이 점점 떨어지는 가장 큰 이유는 저출산 고령화 현상이다. 2000년에는 65세 이상 노인인구가 전체의 18.1%를 차지했으나 2010년에는 20.4%로 늘었다. 5명당 1명이 65세 이상 노인인 셈. 고령화율은 2050년에 33.3%로 예상돼 3명 중 1명이 노인이 된다. 교황까지 나서 출산을 장려하지만 여성 1명이 낳는 아이는 1.4명에 불과하다.

고령화가 급속히 진행되지만 복지제도 개혁은 지지부진하다. 국내총생산(GDP)의 20%, 정부 지출의 40%가 넘는 국민부담률은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이탈리아의 재정적자 비율은 GDP의 ―2.7%, 국가채무는 114.4%이다. 유럽연합(EU)이 제시한 재정건전성 기준(재정적자는 GDP의 3% 이하, 국가부채는 GDP의 60% 이내)과 거리가 멀다.

사정이 이런데도 정부가 추진하는 연금개혁은 완료 시점이 2050년이어서 안일하다는 비판이 쏟아진다.

로마가 속해 있는 라치오 주의 알렉산드라 만다렐리 보건위원장은 “복지는 풀긴 쉬워도 다시 줄이는 건 불가능에 가까울 정도로 힘들다”며 “이탈리아의 위기는 정치권이 고령화 징후에 눈을 감고 당장 표가 되는 유권자만을 위한 복지를 내세운 탓이 크다”고 말했다.

연금개혁 전문가인 페리체 로베르토 피추티 로마대 경제학과 교수는 “복지가 정치적으로 악용되는 순간 복지는 사회를 안정시키는 것이 아니라 무너뜨리는 ‘독’이 된다. GDP 대비 연금 지출 비율을 법으로 정하는 등의 규제 장치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말했다.

로마=정혜진 기자 hyejin@donga.com

▼ 연금개혁 나섰다 실각 경험… 재집권뒤 ‘퍼주기’로 ▼
■ 베를루스코니의 포퓰리즘

“동성애자보다는 젊은 여자에게 열정을 쏟는 게 더 낫지 않냐.”

최근 불거진 미성년자 성(性) 추문에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이탈리아 총리(사진)가 대꾸랍시고 했다가 여론의 뭇매를 맞은 발언이다. 잦은 말실수와 기행에도 불구하고 이탈리아에서 그의 인기는 외국 사람이 보기에는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높고, 절체절명의 정치적 위기를 여러 차례 겪었지만 그때마다 이런 인기를 바탕으로 기사회생했다.

그러나 총리 사퇴 시위에 나선 반대 진영과 학생들은 거꾸로 ‘베를루스코니 총리의 질긴 정치적 생명력을 보면 이탈리아가 왜 경제위기 속에서도 개혁을 못 하는지 이유를 알 수 있다’고 주장한다. 정부와 정치권의 권위가 없어 국민이 반발할 과감한 개혁에 나서지 못하고, 나아가 경제에 대한 국민들의 위기감을 집권당이 정권 유지에 활용하고 있다는 비판이다.

이는 현 정부와 베를루스코니 총리에게만 해당하는 문제가 아니다. 1919년부터 연금제도를 도입한 이탈리아에서는 1970년대 이후 기금 고갈 문제가 꾸준히 제기됐으나 베를루스코니 전까지 임기를 다 채운 총리가 없을 정도로 불안정한 정치 상황 속에서 정치인들은 국민에게 희생을 요구하길 꺼렸다. 발전이 덜 된 남부에서는 정당이 공공부문 일자리 제공을 미끼로 표를 동원하거나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복지 관료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는 일도 공공연히 벌어졌다. 베를루스코니 총리도 첫 집권 때인 1994년 많이 내고 적게 받는 연금제도 개혁을 추진했다가 노조의 강력한 반대에 자신의 부패 스캔들마저 겹쳐 7개월 만에 실각한 바 있다. 이후 베를루스코니 총리는 2001년 다시 집권한 뒤 세금 감면과 연금지원 확대 등 과거와는 정반대의 포퓰리즘적 정책을 펼쳤다.

이탈리아는 세금과 국민연금 등 국민부담률도 GDP 대비 42.75%(2008년 기준)로 스웨덴(47.5%)이나 독일(40.3%)만큼 높은 나라다. 이 때문에 일단 고부담-고복지 국가로 분류돼 저부담-고복지 국가인 그리스 스페인 포르투갈보다는 구조가 낫다는 평가도 나오지만, 스웨덴 독일과 달리 고부담-고복지 국가를 유지하는 데 필수적인 ‘시스템에 대한 신뢰’가 모자란다는 지적을 받는다.

지난해 12월 이탈리아 일간지 라레푸블리카는 이탈리아 납세자연맹의 조사결과를 인용해 “이탈리아는 세금 징수가 가능한 소득 중 54.5%(약 246조 원)가 탈세되고 있다”며 “이는 유럽에서 가장 높은 수치로 2위인 루마니아나 불가리아보다도 월등하게 높다”고 보도했다.

장강명 기자 tesomio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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