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원-직원 마주보며 근무… 아이디어 소통 물흐르듯
DBR 그래픽
1999년 12월 서울. 호주의 맥쿼리그룹 임원들은 한국에서 함께 영업할 파트너를 찾기 위해 국내 은행들을 방문했을 때 이런 이야기를 들어야 했다. 텃밭인 호주 금융시장에선 명성을 날리던 맥쿼리였지만 당시 한국에서의 인지도는 ‘제로’에 가까웠다. 한국맥쿼리그룹의 존 워커 회장은 당시 분위기를 회상하며 “맥쿼리에서 왔다고 소개하면 ‘막걸리요?’라며 되묻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말했다.
2000년 한국에 첫발을 내디딘 맥쿼리는 직원 5명으로 출발했다. 독립 법인 형태도 아니었다. 신한은행과 손을 잡긴 했지만 초기 위험 부담을 고려해 신한은행 내 한 개 팀으로 시작했다. 그로부터 10여 년이 지난 현재, 맥쿼리는 국내에 9개 현지법인·지점을 보유한 금융회사로 성장했다. 직원 수가 300여 명으로 불어났고 운용자산의 총규모는 200억 호주달러(약 22조3000억 원) 수준이다.
○ 틈새시장을 개척하다
2000년대 초반 한국 시장은 다른 선진국 시장과 비교했을 때 아직 정교한 금융기법들이 사용되지 않고 있었다. 맥쿼리는 이런 점에 착안해 틈새시장을 공략했다. 틈새시장 공략은 맥쿼리그룹의 오랜 전통이다. 맥쿼리가 호주에서 급성장할 수 있었던 이유도 오랜 역사를 지닌 투자은행들이 외면하던 인프라 펀드에 역량을 집중했기 때문이다.
맥쿼리는 한국에서도 남들과 차별화할 수 있으면서 자신들이 가장 잘할 수 있는 분야로 인프라 펀드에 주목했다. 인프라 펀드는 단기적으로는 수익이 낮아 보일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 꾸준한 수익을 창출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맥쿼리는 인프라 펀드라는 새로운 시장을 개척함으로써 세계적인 투자은행으로 거듭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
맥쿼리가 한국에 진출할 즈음인 2000년, 한국 정부는 외환위기 이후 극도로 침체된 내수시장을 부양하기 위한 방안으로 인프라 투자에 민간자본을 적극 끌어들이려 했다. 반면 이미 한국에 진출했던 외국계 투자 은행들은 인프라 투자에 거의 관심이 없었다. 굳이 인프라 투자가 아니어도 은행 매각과 기업 구조조정으로 좋은 매물들이 쏟아져 나왔기 때문이다. 후발 주자였던 한국맥쿼리엔 그야말로 ‘무주공산’이었던 셈이다.
▼ 통제보다 자율 중시… 기업가정신 이끌어내 ▼
특히 민간 투자를 활성화하기 위해 한국 정부가 제공한 ‘최소운영수입보장(MRG)’ 덕분에 맥쿼리는 위험을 줄일 수 있었다. MRG는 유료도로의 경우 실제 교통량이 예상치에 미치지 못하더라도 정부가 짧게는 10년, 길게는 20년까지 일정 수익을 보장해주는 제도다. 맥쿼리한국인프라투융자회사(MKIF)가 보유한 주요 자산 중에는 인천대교, 용인∼서울 고속도로, 서울 지하철 9호선, 서울∼춘천 고속도로 등이 있다. 현재 한국 맥쿼리가 조성한 MKIF 펀드는 평가 금액이 약 2조2000억 원에 달한다.
○ 전략적 제휴 전략
맥쿼리는 글로벌 사업 진출 시 전략적 제휴 방식을 적극 활용한다. 현지 선도 기업과의 제휴를 통해 해당 지역 업체가 지닌 고객 및 네트워크를 공유하면서 맥쿼리의 전문성과 노하우를 제공한다는 전략이다. 특히 아시아 시장은 언어, 문화적 차이가 미국이나 유럽 국가들에 비해 큰 편이기 때문에 더욱 적극적으로 제휴에 나섰다.
2000년 한국 시장에 진출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이미 한국에는 도이체은행처럼 수십 년 먼저 진출한 외국계 투자은행이 많았다. 상대적으로 인지도가 낮은 맥쿼리가 선발 업체들과 효과적으로 경쟁할 수 있는 방법은 전략적 제휴가 최선이라고 판단했다.
○ 개방적 의사소통 구조
맥쿼리는 비공식적이고 개방된 분위기의 커뮤니케이션을 지향한다. 단적인 예를 맥쿼리의 사무실 구조에서 찾을 수 있다. 맥쿼리의 임원 대부분은 별도의 공간이 아닌 평사원과 동일한 책상에서 나란히 마주보며 일을 한다. 워커 회장을 비롯한 소수의 임원들이 개인 사무실을 사용하고 있으나 전면이 유리로 돼 있기 때문에 직원들과 쉽게 시각적 접촉을 할 수 있다. 워커 회장의 사무실이 비어 있을 때 임직원들은 이곳을 회의실로 활용한다.
이러한 근접성은 임직원들 간 업무를 더욱 쉽게 조율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동시에 업무에 대한 정보를 지속적으로 보고하고 얻어갈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준다. 한 연구에 따르면 사람은 50m 이상 떨어지면 정기적 의사소통이 단절된다고 한다.
맥쿼리는 통제보다는 자율성을 강조한다. 호주에서 맥쿼리는 두 개의 별명을 갖고 있다. 하나는 ‘부자를 만드는 공장(Millionaire's Factory)’이며 또 다른 하나는 ‘기업가를 배출하는 공장(Entrepreneur's Factory)’이다. 맥쿼리는 회사 내에서 기업가정신을 장려한다. 직원들이 기업가정신을 십분 발휘할 수 있도록 위험 관리 수칙에 벗어나지 않는 한 업무 추진과 관련해 충분한 재량권을 부여한다.
맥쿼리의 주력 사업인 인프라 펀드는 맥쿼리의 기업가적 자율성을 설명하는 가장 좋은 예다. 한국맥쿼리가 인프라 펀드를 선보인 건 2002년. 당시만 해도 호주 시드니 본사에선 한국 시장에서의 인프라 펀드 성공 가능성에 의구심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당시 한국맥쿼리에 갓 입사한 신입 사원이 인프라 펀드를 도입하자며 적극적으로 의견을 개진했다. 워커 회장은 이 직원이 자신이 낸 아이디어를 제대로 된 상품으로 발전시킬 수 있도록 시드니 본사에 파견해 인프라 펀드에 대해 직접 배울 기회를 줬다. 현재 인프라 펀드는 한국맥쿼리의 가장 성공적인 사업으로 자리 잡았다. 이처럼 맥쿼리는 지위를 떠나 모든 사람이 기업가정신을 토대로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내고, 또 그 아이디어를 현실화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
이희진 연세대 교수·호주연구센터 소장 heejinmelb@yonsei.ac.kr
신수정 기자 crystal@donga.com
▼ 한국맥쿼리그룹의 4가지 성공요인 ▼
① ‘퍼스트 무버’로 기회 포착
맥쿼리는 국내에서 인프라 펀드 개념조차 생소했던 시절에 시장 가능성을 보고 가장 먼저 진출해 성공을 거뒀다. 일반적으로 경쟁이 치열한 현대 초경쟁 시대에는 가장 먼저 기회를 선점하는 퍼스트 무버(first-mover)가 시장을 독식하는 사례가 많다. 뒤늦게 진출한 기업이 차지하는 파이는 점차 줄어들고 있다. 한국맥쿼리는 인프라 펀드로 한국 민간자본 사회간접자본(SOC) 부문에서 퍼스트 무버 지위를 획득했다. 이를 토대로 주식워런트증권(ELW) 등 다른 분야로 사업을 확대했다.
② 한국의 ‘빨리빨리’ 문화 흡수
한국맥쿼리그룹의 존 워커 회장은 한국 문화 중 ‘빨리빨리 문화’와 ‘인간관계 중시 문화’를 좋아한다고 말했다. 워커 회장은 이러한 한국적인 문화가 맥쿼리의 비즈니스 성격과 잘 맞는다고 생각한다. 의사결정을 하면 곧바로 해내는 한국의 빨리빨리 문화야말로 한국의 강점이자 맥쿼리가 바라는 문화라는 설명이다. 워커 회장이 한국 문화에 잘 적응할 수 있었던 이유로는 현지인 채용과 현지 문화 및 관행에 대한 열린 자세를 들 수 있다. 현재 한국맥쿼리그룹의 한국인 채용 비율은 95%를 넘는다.
③ CEO의 현지화 리더십 빛나
한국 여성과 결혼한 워커 회장은 한국 요리도 배우고 동화책도 쓰며 한국 사회의 흐름을 이해하기 위해 다양한 세미나와 포럼에 참석하고 있다. 최근에는 한국의 중요한 인구 추세인 고령화와 다문화 관련 행사에 참석해 연설을 하기도 했다. 사회 변화의 흐름을 읽어 한국 사회가 필요로 하는 신사업을 개발하려는 노력의 일환이다. 한국을 알고자 적극적으로 노력하는 최고경영자(CEO)의 모습은 직원과 고객들에게 많은 공감대를 형성하면서 브랜드 이미지 제고에도 기여하고 있다.
④ 개방적인 조직 문화와 의사소통
맥쿼리의 조직 운영 철학은 ‘틀 속의 자유(Freedom within the Boundaries)’로 요약된다. 이는 큰 틀에서 몇 가지 지켜야 할 사안은 반드시 지키되 그 안에서는 자율적이고 개방적으로 일을 진행하도록 허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틀 속의 자유는 직원들이 기업가정신을 발휘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했다. 맥쿼리는 관료적, 계급적 조직 분위기에서는 발 빠른 의사결정 및 실행력 담보가 어렵다고 보고 있다. 워커 회장은 모든 직원이 필요시 언제든지 자신과 자유롭게 대화할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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