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1년 군사정변으로 집권한 박정희 정부는 ‘한 치의 땅도 놀리지 말고 식량을 증산하자’며 보릿고개 극복에 나섰다. 하늘만 바라보는 천수답 농업에서 벗어나기 위해 농업용수 개발을 추진했다. 이런 노력으로 한국의 연평균 쌀 생산량은 1953∼1955년 214만 t에서 1961∼1965년 350만 t으로 늘었다. 하지만 경제 개발과 소득 증대로 쌀 소비가 늘면서 쌀의 자급자족은 역부족이었다. 이런 고민을 해결한 결정적 계기가 ‘기적의 볍씨’ 통일벼 개발이었다.
▷향년 83세로 그제 타계한 허문회 서울대 명예교수는 ‘통일벼의 아버지’로 불린다. 고인은 1960년대 후반 필리핀의 국제미작연구소(IRRI)가 개발한 인디카 쌀의 다수확 신품종(IR 계통)을 접한다. 농업과학자들이 참여한 팀을 꾸려 신품종 개발에 나선 그는 1971년 IR 계통 벼와 자포니카 계통 벼를 교잡한 다수확 신품종 통일벼 개발에 성공했다. 박 대통령과 박진환 대통령 경제담당 특별보좌관의 전폭적인 지원도 큰 힘이 됐다. 병에 강하고 일반 벼 품종보다 생산량이 약 40% 많았던 통일벼 보급으로 한국의 ha당 쌀 수확량은 1972년 3.34t에서 1977년 4.94t으로 치솟았다. 1970년대 한국의 쌀 생산 급증은 ‘아시아 녹색혁명’의 대표적 성공사례로 꼽힌다.
권순활 논설위원 shkwo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