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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의 기억, 100년의 미래/긴박했던 조선의 운명]③경술국치는 국제법적으로 무효

입력 | 2010-02-08 03:00:00

‘병합 5개조약’ 비준 누락 등 당시 기준으로도 무효
日, 영어번역 과정중 각서를 협정처럼 변조까지




국권을 빼앗긴 뒤인 1918년 서울 덕수궁 석조전 앞에서 대한제국 황족과 조선총독부 관리들이 함께 사진을 찍었다. 가운데 모자 벗은 사람이 고종, 그 오른쪽이 순종이다. 고종의 왼쪽은 영친왕이고 영친왕의 옆은 데라우치 마사타케 초대 조선총독. 동아일보 자료 사진

《1910년 8월 22일 오후 창덕궁에서 열린 대한제국 마지막 어전회의. 순종 황제는 총리대신 이완용, 내부대신 박제순, 농상공부대신 조중응 등 일제 통감부와 사전 조율을 마친 대신들이 재가를 요청하는 문서를 앞에 두고 2시간 동안 침묵했다. 그 문서는 내각총리대신에게 한일병합조약의 전권을 맡긴다는 위임장이었다. 이날 창덕궁과 경운궁(오늘날의 덕수궁) 근처에는 2600여 명의 일본군이 30m 간격으로 늘어서 무력시위를 하고 있었다. 이날을 위해 일제는 1910년 6월 자국 고위관료들로 구성된 ‘한국병합준비위원회’를 발족한 뒤 대한제국이 마련할 위임장까지 준비했다. 전권위임장이 마치 왕이 직접 말하는 것처럼 ‘짐이 동양평화를 공고히 하기 위해’로 시작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순종이 일제와 친일 대신들의 강요를 더 견디지 못하고 자신의 이름자 ‘척(척)’을 적고 대한국새(大韓國璽)로 날인하자 이완용은 이를 들고 곧장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 통감이 기다리고 있는 관저로 달려가 한일병합조약을 체결했다.》

○ 순종의 비준이 없는 한일병합조약

일제는 한일병합조약이 국제법적 요건을 갖출 수 있도록 치밀한 준비를 했다. 데라우치 통감은 사후 자국 총리에게 올린 ‘한국병합시말’ 기밀문서에서 ‘지금까지의 관련 조약들은 여러 문제가 있지만 이 조약만은 모든 요건을 다 갖추도록 노력했고 또 그렇게 될 수 있도록 총리대신 이완용에게도 당부했다’고 적었다.

일제의 치밀한 계략도 순종의 비준을 받지 못해 결과적으로 실패했다. 순종은 전권위임장은 내주었지만 비준에 해당하는 ‘병합을 알리는 조칙’에는 서명을 하지 않았다. 이는 현재 기준은 물론이고 당시 기준으로도 무효 사유다. 순종은 1926년 운명하기 전 남긴 유언에서 “지난날의 병합 비준은 강린(强隣·일본)이 역신의 무리와 더불어 제멋대로 해서 제멋대로 선포한 것이요 다 나의 한 바가 아니다”라며 비준이 없었음을 분명히 했다.

○ 병합 이전 조약도 국제법적으로 불법

데라우치 통감의 고백처럼 일제가 한반도를 삼키기 위한 단계별 조약들은 모두 국제법적 절차적 요건을 갖추지 못했다. 일제는 1904년 2월 조선의 영토사용권을 골자로 하는 한일의정서, 1904년 8월 외교권을 탈취하는 1차 한일협약, 1905년 11월 한국을 ‘보호국’으로 만드는 2차 한일협약(을사늑약), 군사·내정권을 빼앗는 1907년 7월의 3차 한일협약(정미칠조약) 등 네 가지 조약을 강요해 체결하는 과정에서도 국제법적 결함을 드러냈다.

한일병합조약을 포함한 5개 조약의 결격 사유를 처음으로 밝힌 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는 “영토권 외교권 등 당연히 공식 조약으로 체결해야 하는 사안을 약식으로 처리한 것 자체가 조약 요건을 갖추지 못했다”고 설명했다.

1904년 2월 한일의정서는 러일전쟁을 일으킨 일제가 조선에 군대를 주둔시키기 위해 영토권을 침해한 것으로 정식 조약의 형태를 띠지 못했다. 1차 한일협약에는 협정을 규정하는 제목도 없고, 권한 위임에 대한 기록도 없이 합의사항만 나열했을 뿐이다. 일본 정부가 추천하는 재정고문과 외교고문을 고용하고 외교행위는 일본 정부와 미리 상의해야 한다는 ‘국권 간섭’인데도 외교 조약의 형식을 취하지 않았던 것이다.

을사늑약도 특파대사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헌병을 동원해 퇴궐하는 대신에게 한 명씩 찬반을 물어 강압적으로 맺은 것이어서 무효일 수밖에 없다. 고종의 승인도 없었다. 도시환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법학)은 “을사늑약 당시 일제의 강박은 국가 자체와 국가의 대표 모두에게 사용돼 법적 효력을 인정할 수 없는 무효 요건을 갖췄다”며 “설사 비준이라는 형식적 요건을 갖췄다고 하더라도 이런 이유 때문에 무효”라고 강조했다.

고종 황제가 강제 퇴위당한 직후인 1907년 7월 24일 맺은 정미칠조약도 전권위임 없이 총리대신 이완용과 이토 통감이 임의로 체결했다고 이 교수는 지적했다. 당시는 고종의 강제 퇴위에 반발한 순종이 정식 집무를 시작하지 않은 기간이기 때문이다.

일제는 국제사회에서 인정받기 위해 문서를 변조하기도 했다. 당시 일제 외무성과 서울 공사관을 오간 전보문을 보면 일제는 1차 한일협약을 각서(memorandum)로 취급했는데도 이를 미국과 영국에 보낼 때는 국제법상 ‘협정’을 뜻하는 ‘agreement’를 제목에 넣어 마치 정당한 조약인 것처럼 포장했다. 각서는 작성 당사자들 간의 이해관계에 그치지만 외교조약은 제3국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이 크게 다르다.

○ 전권위임과 비준은 필수

한일병합조약의 적법성을 따지는 국제법의 기준은 ‘특정 사건은 그 사건이 일어난 당대 법의 효력에 따라 판단해야 한다’는 시제(時際)법이다. 일본도 “당시 법 기준으로 판단해야지 현재의 법적인 정의로 소급 적용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당시 기준으로 보더라도 협약이 무효라는 연구 결과가 잇따르고 있다.

박배근 부산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지난해 6월 ‘시제법적 관점에서 본 조약 체결의 형식과 절차’라는 논문에서 9세기 말∼20세기 초 국제법 개설서를 분석해 병합조약 체결 당시의 조건을 보면 조약은 무효일 수밖에 없다고 밝혔다.

그는 당시 국제법적 기준은 △외교장관이나 외교사절이 아닌 사람에게는 전권위임장이 반드시 필요하고 △조약은 비준되는 게 원칙이었음에도 한일강제병합 관련 조약들은 정식 조약과 약식 조약의 구분도 없고 전권위임장이나 비준서도 없어 당시의 국제법적 기준을 적용해도 무효라는 주장이 타당하다고 밝혔다.

이근관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2002년 ‘한국병합의 불법성에 관한 연구’에서 을사늑약이 당시 국제법 기준으로도 무효 요건에 해당하는 ‘국가 대표에 대한 강박’에 해당하는 점을 논증했다. 이 교수는 “시제법을 기계적으로 적용하는 것을 뛰어넘어 오늘날의 정의감을 반영한 새로운 법적 관점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허진석 기자 jameshuh@donga.com

▼ 日정부 “부당하지만 불법 아니다” 계속 주장 ▼

“(한일강제병합 체결) 당시 세계 상황을 보면 그런 행동은 일본에 국한된 건 아닌지도 모른다.”

2일 오카다 가쓰야(岡田克也) 일본 외상은 “한일강제병합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자국 기자의 질문에 여전히 병합의 강제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제국주의 시대 일본만 식민지 정책을 쓴 게 아니기 때문에 병합을 문제로 삼을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오카다 외상의 발언은 일본 민주당 정권도 한일병합의 실체적 진실을 직시하기 어렵다는 한계를 보인다.

한일강제병합에 대해 일본 정부가 취한 가장 전향적인 태도는 1995년 10월 5일 사회민주당의 무라야마 도미이치(村山富市) 총리가 참의원 본회의에서 한 발언이다. 하지만 그도 ‘병합조약에 기초한 통치에 대한 정치적 도의적 평가로서 깊은 반성과 유감의 뜻’을 표하면서 “당시의 국제관계 등 역사적 사정 속에서 (조약이) 법적으로 유효하게 체결되고 실시된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른바 부당하지만 국제법적으로 유효하다는 ‘유효부당론’이다.

이후 일본은 무라야마 총리의 발언에서 한 걸음도 나아가지 않았다. 특히 일본 우파는 한일강제협약의 합법론을 고수하고 있다. 병합은 동양 평화를 위한 것이었으며 도덕적으로나 법적으로 문제가 없다는 태도다.

이 같은 일본 내 기류로 인해 1965년 한일기본관계 조약 2조 ‘대한제국과 일본제국 간에 체결된 모든 조약 및 협정이 이미 무효임을 확인한다’는 구절에 대한 해석도 양국이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한국은 이를 ‘원천 무효’로 해석하는 데 반해 일본은 대한민국이 수립된 1948년까지는 유효하다고 해석하고 있다. 특히 일본은 한일강제병합의 불법성을 인정한다는 것은 근대국가의 초석을 다진 메이지 시대에 대해서도 반성적 태도를 지녀야 한다는 의미를 지니기 때문에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국내 학계에서는 이러한 일본의 잘못된 인식을 깨뜨리려면 강제병합 체결 당시의 강박적 상황 외에도 국제법을 기준으로 한 절차적 부당성을 견지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일본도 메이지 초기에는 정한론(征韓論·1870년대 전후 일본 정계에서 강력하게 대두된 한반도 공략론)을 공공연하게 외치다가 지도층이 서양 국제법 체계를 직접 둘러보고 온 뒤에는 ‘남의 나라를 침략하자는 주장 자체가 서양 국제법 세계에서는 문제가 된다’는 사실을 알고 나름대로 국제법 연구에 매달렸다.

허진석 기자 james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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