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원에서 서양사를 전공한 정 씨를 지도한 이화여대 조지형 교수는 “사실과 해석의 문제에 관심이 많은 뛰어난 제자”라고 말했다. 대학교수와 박사급 연구자의 논문을 주로 싣는 문화사학회 학술지 ‘역사와 문화’(2008년)에 이례적으로 정 씨의 석사논문이 실린 건 우연이 아니다. 논문을 심사한 문화사학회 김기봉 회장은 정 씨를 “영어 해독 능력이 뛰어나고 문화적 소양도 상당하며 주관이 분명한 역사연구자”라고 평했다. 사실 관계를 판단하고 맥락을 이해하는 정 씨의 능력을 의심할 이유를 찾기 어려웠다.
그러나 PD수첩 사건의 1심을 맡은 문성관 판사는 증인으로 나선 정 씨에게 패배를 안겼다. PD수첩 제작 의도와 과정, 취재 내용을 정확히 알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아 믿을 수 없다는 것이다. 정 씨는 1심 판결이 나온 뒤 문 판사에게 두 차례 공개질의서를 보냈다. 그는 질의서에서 ‘문 판사의 판결문 내용은 논리적 귀결과 공정성 객관성 도덕성 면에서 지나치게 수준 미달’이라고 주장했다. 질의서에 담긴 108개 질문은 그의 주장을 충분히 뒷받침하고 있다. 번역이 핵심 쟁점인 재판에서 PD수첩 측이 오역한 자료들이 무죄 판결의 증거로 채택된 것도 알 수 있다.
1심 무죄 판결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정 씨가 책 말미에 쓴 말을 음미할 필요가 있다. “내가 보기에 그들은 이미 재판 결과를 떠나 죽은 사람들이라는 것이었다. 내가 항상 의식하는 입증, 논증, 검증의 인격, 그리고 그것이 보장하는 최소한의 양심, 그들은 그것을 이미 상실한 지 오래였기 때문이었다.”
언론이 문 판사의 판결을 기준으로 PD수첩 수준의 고의적 실수와 왜곡 과장을 허용한다면 어떻게 될까. 한국 언론은 완전 사이비 언론으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PD수첩 김보슬 PD는 2008년 6월 광우병 시위 현장에서 방송작가에게 “당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눈에 보여?”라고 물었다. 선동의 힘을 그들은 보았을까. 이번 판결은 이런 악의(malice)의 선동가들에게 자성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문 판사가 최소한 사실 관계의 잘못은 인정하고 악의가 있었는지를 가렸다면 의미 있는 판례를 남길 수도 있었다. 나는 문 판사에게 ‘무슨 일을 했는지 아느냐’고 묻고 싶다.
권순택 논설위원 maypol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