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이 편찮으면 그러한 시간이 남아도는 의외의 여가를 얻게 된다. 그 덕택에 나는 글에서나 보던 이른바 음악치료법(musico-therapy)의 ‘모차르트 효과’가 허구 아닌 실제임을 깨닫게도 됐다. 60 이하의 맥박수가 갑자기 100∼120으로 치솟아 가슴이 콩닥콩닥 뛸 때 누워서 모차르트 음악을 한 시간 남짓 듣고 있으면 이제는 따로 약을 먹지 않아도 어느새 맥박수가 저절로 내려가곤 한다. 죽음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더 이상 모차르트를 듣지 못하는 것”이라고 대답했다는 아인슈타인의 일화가 요즈음엔 왠지 마음에 와 닿는다.
성악가 루트비히의 레가토
노래를 듣기만 한 사람이 그 노래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를 알게 된다는 것은 귀중한 체험이다.(그건 잘 차려진 음식의 성찬을 맛본 사람이 그를 조리해낸 요리사의 주방을 구경해 보는 것이라고 할까) 나는 그 체험을 통해 노래 부르는 가수가 가장 유의해야 할 점의 하나가 레가토(소리 사이를 끊지 말고 부드럽게 이어가기)임을 알게 됐다.
노래가, 노래의 말소리가, 노래의 가락이 단절되지 않고 이어져야 한다는 점을 루트비히는 강조하고 또 강조하고 다시 또 강조한다. ‘레가토 레가토 레가티시모!!’란 말을 너무 많이 반복하기 때문에 나는 시계를 대고 한번 세어 봤다. 루트비히는 모차르트의 두 오페라 아리아를 지도하는 22분 동안 스물여섯 번이나 레가토, 레가토를 반복했다. 그녀는 자기에게 레가토를 가르쳐 준 사람이 카라얀이었다는 말도 실토한다. 레가토가 무엇인지 설명해주기 위해 그녀의 대선배이자 무대 동료였던 절친한 친구 엘리자베트 슈바르츠코프의 부군 월터 레그의 말을 인용해 주기도 한다. 슈바르츠코프를 대성시킨 후원자였던 레그는 노랫말의 자음(子音)이 참새들이라면 노랫말의 모음(母音)은 그 참새 떼가 앉아 있는 빨랫줄처럼 이어져 있어야 했다던가.
동서 대립을 콘크리트 구조물로 상징하던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지 이번 달로 만 20주년을 맞는다. 냉전은 종식됐고 분단된 동서는 하나의 시장경제체제로 통합되는 세계화 시대의 축복을 맞는 듯했다. 그러나 세계화의 시대는 통합의 세계가 아니라 아무도 아무데에도 든든하게 기댈 곳이 없는 시대, 누구나 어디든, 언제든, 무엇이든 엄청난 이윤만 있다면 도박판처럼 몰려들고 또 빠져나가 버리는 카지노 자본주의의 세계, 맹수(猛獸) 또는 약탈수(掠奪獸) 자본주의의 세계. 아무도 어떻게 손을 써 볼 수가 없는, 그야말로 고삐 풀린 말처럼 통제 불능의 세계(runaway world·앤서니 기든스의 말)…. 아니 그게 그러나 어찌 까마득히 먼 저 큰 세계의 모습이기만 하단 말인가. 그것은 그대로 우리가 우리의 주변에서 보는 일상세계의 모습, 우리의 정치문화, 노사문화, 관료문화의 일상적인 모습이라고 해서 잘못일까.
정신 사나운 행정수도 논의
최정호 울산대 석좌교수·본보 객원大記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