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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갈피 속의 오늘]1896년 고종, 러시아 공관 피신

입력 | 2009-02-11 02:57:00


1894년 청일전쟁의 승리를 발판으로 대륙과 한반도 침략 야욕을 본격적으로 드러낸 일본은 1895년 을미사변(乙未事變)을 저질렀다.

1895년 10월 8일 새벽, 경복궁 내 건청궁에서 일본 낭인들이 명성황후를 무참히 시해한 것이다. 을미사변을 계기로 조선에 대한 일본의 압박은 더욱 거세졌다.

조선의 자주권을 확립해야 할 고종으로선 이 난국을 극복할 방안을 찾는 것이 매우 시급했다. 고종은 일본의 간섭을 막을 수 있고 동시에 신변을 안전하게 보호할 수 있는 곳을 찾았다. 그곳이 바로 러시아공사관이었다. 러시아공사관에서 안전하게 지내면서 러시아의 힘을 빌려 일본의 간섭을 견제하겠다는 고육책이었다.

을미사변 이듬해인 1896년 2월 11일 새벽, 고종은 왕세자와 함께 궁녀들이 마련해 준 가마를 타고 극비리에 서울 정동의 러시아공관으로 옮겼다. 끔찍한 사건이 일어났던 경복궁을 버리고 1년간 러시아공사관으로 몸을 피한 것이다.

당시 친러파들은 러시아공사관으로 고종을 피신시키기에 앞서 인천에 대기 중이던 러시아 병사와 각종 무기를 서울로 이동시켰다. 혹시 모를 일본의 저항에 맞서 싸우기 위한 것이었다.

당시 러시아공사관은 노관(露館) 또는 아관(俄館)으로 불렸다. 그래서 이 사건을 아관파천(俄館播遷)이라고 한다.

아관파천 당시 러시아공사관에 도착한 고종은 즉시 친일 대신들을 역적으로 규정한 뒤 체포 또는 사살을 명령했다. 이로써 친일 내각은 몰락하고 친러파 내각이 구성되었다. 일단 친일세력을 무력화시키긴 했지만 외세의 힘을 빌려 정치를 하는 데 부작용이 없을 수 없는 법.

조선의 왕을 보호하고 있는 러시아는 이 기회를 이용해 조선 정부에 압력을 가해 막대한 이권을 빼앗고 각종 침략의 발판을 마련했다. 일본의 간섭에서는 벗어났지만 러시아의 압력에 휘둘려야 했던 것이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러시아의 영향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국내외 여론이 비등해졌다. 이에 따라 러시아공사관으로 옮긴 지 1년 만인 1897년 2월 25일, 고종은 러시아공사관을 떠나 덕수궁(당시 이름은 경운궁)으로 자리를 옮겼다. 덕수궁을 택한 것은 이곳 주변에 미국과 러시아 등의 공사관이 몰려 있어 일본을 견제하기에 유리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현재 러시아공사관은 서울 중구 정동길에 남아 있다. 본관 건물과 탑 건물이 모두 6·25전쟁 때 파괴되었으나 1970년대에 3층짜리 탑 건물을 복원해 놓았다. 요즘 볼 수 있는 러시아공사관은 바로 이 탑 건물이다.

이광표 기자 kpl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