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년전 초판 오역 늘 찜찜 바로잡게 돼 너무 홀가분”
최근 장 폴 사르트르의 자서전 ‘말’(민음사)의 재번역판을 펴낸 정명환(79·사진) 전 서울대 교수는 새로 나온 책을 보면서 1964년의 일을 떠올렸다.
그해 초 프랑스에서 ‘말’이 나오자 실존주의, 계약결혼 등으로 화제를 뿌린 사르트르의 유년기를 궁금해 하던 세계 독자들이 이 책에 열광했다. 그해 가을 사르트르는 노벨상 수상자로 선정됐으나 문학의 제도권 편입에 반대한다며 수상을 거부했다.
저작권 개념이 정립되지 않았던 당시 한국의 출판사들은 사르트르의 최신작인 ‘말’을 먼저 출간하기 위해 번역자 섭외 경쟁을 벌였다. 정 교수는 공동번역자인 고 김붕구 전 서울대 교수와 함께 지문각이라는 출판사에 붙들렸다.
정 교수는 “사실상 감금 상태였다”고 회고했다. 출판사 직원의 ‘감시’ 때문에 집에 가지도 못한 채 여관방에서 숙식을 해결했다는 것이다. 번역은 한 달 만에 끝났지만 이때부터 정 교수의 ‘마음의 빚’이 시작됐다.
“급하게 하다 보니 오역투성이였습니다. 문맥을 잘못 짚거나 문화적 배경을 따지지 못해 틀리게 번역한 부분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습니다.”
정 교수는 ‘불쏘시개나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계속 해오다 몇 년 전 민음사에 재번역 출간을 제안했고 이번에 재번역판을 냈다.
‘말’은 한 살 때 아버지를 여읜 사르트르가 외할아버지의 집에서 보낸 유년 시절을 기록한 자서전. 몸이 약해 또래 아이들과 어울리지 못했던 사르트르에게 할아버지의 서재는 유일한 놀이터였다. 사르트르는 그곳에서 책을 통해 세계를 만났고, 인류의 지혜와 씨름했다.
정 교수는 “까불까불한 문체로 쓴 이 작품은 내용과 문체가 절묘하게 맞아떨어진다”면서 “위엄을 부리는 사람들에게 이 책을 읽히고 싶다”고 말했다. ‘말’을 읽으면 누구든 스스로에게 천박한 구석이 있음을 깨닫게 된다는 얘기였다.
정 교수는 사르트르 전문가다. 학술원 홈페이지에 직접 올린 ‘연구 업적’에서도 “사르트르의 문학과 사상을 살펴 왔고, 본인이 쓴 모든 글에는 사르트르의 영향과 그에 대한 비판이 내포돼 있다”고 밝혔다.
그런 그였기에 ‘말’의 1964년 번역판에 대해 늘 창피하게 생각하고 마음의 빚으로 여겨 왔던 것이다. “이제 큰 짐을 벗어 홀가분해졌다”며 그는 사르트르와 함께해 온 일생을 되돌아봤다.
“사르트르는 나에게 세상을 어떤 식으로 생각해야 할지 택함에 있어 가장 큰 자극을 주었습니다. 항상 깨어 있도록 했습니다. 그렇다고 세상의 문제를 해결해주는 교사는 아니었죠. 스스로 문제의식을 갖게 하고, 스스로 해답을 찾도록 채찍질하는 존재였습니다.”
금동근 기자 gold@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