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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갈피 속의 오늘]1982년 팔레스타인 난민촌 학살극

입력 | 2008-09-18 02:59:00


밤새 계속 이어지던 총소리는 먼동이 트고서야 멈췄다.

미국 뉴욕타임스의 토머스 프리드먼 레바논 특파원이 도착했을 때 레바논 수도 베이루트 외곽의 팔레스타인 난민촌은 이미 죽음의 땅으로 변해 있었다.

샤브라와 샤틸라의 난민촌 곳곳에는 수십에서 수백 구의 시신이 뒤엉킨 채 널브러져 있었다. 2000여 명의 희생자 중에는 어린아이와 부녀자도 상당수 포함돼 있었다.

프리드먼 특파원은 자신의 눈앞에 펼쳐진 지옥의 모습을 서둘러 뉴욕 본사로 보냈다. 프리드먼 특파원의 기사는 다음 날 뉴욕타임스 신문 4면에 걸쳐 상세히 보도됐다.

1982년 9월 18일 세상에 알려진 이 사건은 캄보디아 학살극 이후 최대의 학살극으로 역사에 기록됐다.

학살극은 이스라엘의 비호를 받은 레바논 ‘팔랑헤당’ 민병대원들이 저질렀다. 민병대원들은 4일 전 폭탄공격으로 바시르 제마옐 대통령이 사망하자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를 복수의 대상으로 지목했다.

이스라엘군도 친이스라엘계인 제마옐 대통령이 암살되자 즉각 레바논에 진입해 샤브라와 샤틸라 지역을 봉쇄했다.

16일 밤 이스라엘군은 무장한 팔랑헤당 민병대원 200여 명을 난민촌으로 들여보냈다.

난민들에게 닥치는 대로 총기를 난사한 팔랑헤당 민병대원들의 광란의 학살극은 18일 새벽에야 끝이 났다.

난민촌 외곽을 탱크로 경계하며 난민들의 도주를 막았던 이스라엘군은 학살극이 끝나자 민병대원들과 함께 서둘러 현장에서 철수했다.

세계의 비난이 즉각 이스라엘에 쏟아졌다. 이스라엘 내에서도 30만 명이 메나헴 베긴 총리와 아리엘 샤론 국방장관의 사임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다.

당황한 이스라엘은 대법원장을 위원장으로 하는 조사위원회를 구성했고 4개월여 뒤 보고서를 발표했다.

그러나 이 보고서는 ‘샤론 국방장관이 자신의 책무를 망각하였다고 생각한다. 팔랑헤 민병대를 난민촌으로 들어가게 만든 중대한 실수를 범했다고 본다’며 배후론을 부인했다.

이후 2001년 학살극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들이 이스라엘 총리에 오른 샤론을 벨기에 법정에 고발하자 학살극 당시 민병대를 이끌었던 엘리 호베이카는 법정에서 샤론의 죄상을 증언하겠다고 밝혔다.

학살극 이후 친시리아계로 돌아선 호베이카는 외교장관과 두 차례 국회의원을 지냈으나 증언을 앞둔 2001년 1월 24일 의문의 폭탄 테러로 암살됐다.

레바논 관리들은 즉각 이스라엘을 배후로 지목했지만 샤론 총리는 “우리의 관점에서 우리는 이 사람과 아무런 관련이 없고, 이런 것을 언급할 가치조차 없다”고 정면으로 반박했다.

결국 학살극의 배후는 아직까지도 밝혀지지 않고 있다.

이현두 기자 ruch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