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 각자의 영화관’은 칸영화제 60주년을 맞아 마련한 거장 35인의 옴니버스영화이다. 생각해보면 이처럼 영화의 특성을 잘 표현한 제목도 드물다 싶다. 매표를 하고 착석하면 소란스럽던 영화관은 불이 꺼짐과 동시에 침묵의 상태에 빠진다. 영화관에 앉은 수백 명의 사람이 모두 같은 영화를 보지만 남는 추억은 다르다. 다함께 같은 영화를 봐도 그들에게는 ‘각자의 영화관’일 수밖에 없다.
여름이나 겨울이면 ‘성수기’라는 이름 아래 대중영화가 쏟아져 나온다. 대중영화란 말 그대로 한 사람 한 사람의 기호보다 많은 사람이 좋아할 만한 보편적 즐거움을 추구하는 영화라고 할 수 있다. 보편적 오락이라는 개념에는 ‘작가’ 혹은 ‘개성’이라는 말이 빠져 있다. 그래서 대중성은 단순한 오락 개념과 혼동된다. 100명이 좋아하는 한 가지 영화라는 전제에 개인의 주관성이라는 개념이 끼어들기는 쉽지 않다.
역설적이게도 영화관은 매우 주관적인 장소다. 많은 사람이 함께 같은 영화를 보지만 실상 ‘그들 각자의 영화관’이라는 말처럼 추억은 각각이다. 누군가는 애인의 손을 잡고 영화를 보지만 누군가는 이별의 고통을 잊기 위해 같은 영화를 선택한다. 즐거운 마음에 코미디 영화를 보기도 하지만 누군가는 하루 종일 걷던 황망한 마음을 쉬고자 코미디 영화를 선택한다.
어두운 영화관 속에서 다른 추억을 쌓아가는 관객의 이미지는 마치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의 다양한 운명을 은유하는 듯하다. 오늘, 그곳에서 같은 영화를 보며 웃고 소리 지르지만 영화관을 나서는 순간 인생의 궤도는 다른 방향으로 펼쳐진다. 수백 명이 본 영화의 추억은 그들 각자의 무엇으로 침전되어 개인사에 기록된다.
그런 점에서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 ‘뉴욕 무비(New York movie)’는 대중적 장소인 영화관에서 느끼는 개인의 고독을 잘 표현한 작품이다. 영화 상영이 한창인 때 한 여자가 불 켜진 복도에 홀로 기대어 서 있다. 사람들은 모두 어두운 객석에 앉아 스크린을 향해 시선을 고정하지만 그녀만큼은 영화에서 이탈해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 있다.
숙인 고개나 턱을 받쳐 든 손은 그녀의 고민이 심각함을 짐작하게 한다. 그녀가 서 있는 복도는 분명 그들과 같이 있는 영화관이지만 그녀는 그들로부터 완전히 동떨어져 있다. 역설적이게도 그녀가 서 있는 복도의 불빛은 그녀의 깊은 슬픔과 어두움을 더 강조해 준다. 숙인 고개 밑에 드리워진 그늘이 복도의 불빛에 더 짙어 보이는 까닭도 이 때문일 것이다.
각자 다른 삶의 경유지로서의 영화관의 개념은 리안 감독의 ‘색계’라는 영화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주인공 왕치아즈는 친일파 두목을 암살하기 위해 정부(情婦)로 위장한다. 왕치아즈는 틈나는 대로 홀로 영화관에 들어가 옛날 영화를 본다. 그녀는 영화를 보면서 스크린 속 여배우에게 자신을 이입한다. 여배우들이 스크린 속에서 연기를 한다면 ‘나’는 현실이라는 무대 위에서 연기할 뿐이라고 말이다. 불이 꺼지는 순간만큼은 자신의 형편없는 삶을 연기라며 위안할 수 있다. 비록 영화관에서 나오는 길목에 자신의 정보를 기다리는 항일단체와 만나야 하지만 말이다.
사람들은 현실의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영화관에 간다고 말한다. 밖에 비가 오든, 눈이 오든, 폭염에 찌들든 간에 영화관 안은 언제나 동일한 어둠으로 격리돼 있다. 하지만 때로 그 어둠은 내면의 불을 켜 또 다른 고독감을 선사한다. 그래서 영화관은 ‘그들 각자의 공간’일 수밖에 없다. 불이 꺼지고 옆사람의 존재가 희미해지면 영화와 나, 둘만 남는다.
강유정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