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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갈피 속의 오늘]1910년 앙리 뒤낭 사망

입력 | 2007-10-30 03:02:00


의욕이 얼마나 컸기에 전쟁터까지 찾아갔을까. 31세의 앙리 뒤낭이 1859년 6월 이탈리아 카스틸리오네 인근의 솔페리노를 찾은 것은 사업 확장 때문이었다.

알제리에서 농장과 제분 사업을 계속하기 위해서는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 3세의 도움이 필요했다. 당시 프랑스는 사르디니아(당시 이탈리아 북부에 있던 국가)와 함께 연합군을 구성해 솔페리노에서 오스트리아 군대와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스위스의 부유한 실업가이자 자산가였던 뒤낭의 부모는 그가 어렸을 때부터 경제관념을 강조했다. 그들은 아들이 은행가로서 사회생활을 시작하자 매우 만족해했다. 뒤낭은 스위스 은행 알제리 지점에서 근무하던 중 좋은 사업기회를 발견하고 사업가로 변신했다. 솔페리노를 찾은 때가 알제리에서 개인 사업을 하고 있던 시기였다.

그러나 그는 그곳에서 인생을 뒤바꾸는 ‘벼락같은’ 상황과 마주친다.

“환상 속에서나 볼 수 있는 끔찍한 연극을 보는 듯했다. 바닥에는 4만 명이나 되는 시신이 널려 있었고, 팔다리가 잘린 병사들이 도처에서 신음하고 있었다.”

그가 일기에 남긴 내용이다. “내 인생에서 돈은 이제 의미가 없다.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돕는 것이 더 중요한 가치다.”

그는 솔페리노 현장에서 민간인을 모아 몇 주 동안 적군과 아군을 가리지 않고 부상자 치료를 도왔다. 연합군을 설득해 포로로 잡혀 있던 적군 의사와 위생병들까지 데려와 함께 일했다.

가슴에 뜨거운 열정을 품은 그는 1862년 ‘솔페리노의 회상’이란 책을 펴내며 전시에 부상자를 돌볼 중립적 단체의 설립을 주창했다. 세계적인 구호단체 ‘적십자’의 시작이었다.

1863년 현 국제적십자위원회의 전신인 국제부상자구호위원회를 만든 뒤낭은 자신의 사업을 제대로 돌보지 않아 말년에는 곤궁한 삶을 살았지만 1901년 제1회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는 영광을 안았다. 그런 그가 스위스의 산속 마을 하이덴에서 눈을 감은 날이 1910년 오늘(10월 30일)이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오른 집값 때문일까. 돈을 숭상하는 풍조가 젊은이들 사이에서도 확산되고 있다. 솔페리노의 깨달음은 무엇이었을까.

허진석 기자 jameshuh@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