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 가루로 칠레 사람들의 이름을 표현한 뒤 그 이름을 태워 나가면서 인간 존재에 대한 철학적 사유를 제공한 오인환 씨의 ‘남자가 남자를 만나는 곳’. 이번 전시에서 칠레인들에게 가장 강한 인상을 남긴 작품 가운데 하나다. 산티아고=이광표 기자
산티아고 현대미술관 중앙홀 천장에 설치된 서도호 씨의 ‘계단’과 최정화 씨의 ‘경찰’. 서로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두 작품을 한 공간에 배치해 칠레인들에게 새로운 미술 경험의 기회를 제공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산티아고=이광표 기자
‘대담하고 놀라운 한국미술, 산티아고에 오다.’
칠레의 유력 일간지 ‘라 세군다’ 11일자 문화면은 이 같은 제목으로 톱기사를 실었다. 사흘 뒤인 14일 오후, 칠레 산티아고 중심가에 위치한 현대미술관 입구. 미술관 전면을 장식한 한국작가 최정화 씨의 풍선 설치미술 ‘웰컴(Welcome)’을 바라보던 칠레 여성 트리니다드 에스데이 씨는 이렇게 중얼거렸다. “미술이란 것이 어려운 줄 알았는데 풍선도 예술이 될 수 있다니….”
미술관 내부로 발걸음을 옮긴 그는 중앙홀 천장의 중간을 장식한 주황빛 천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이층집 실내 계단을 연상시키는 서도호 씨의 작품 ‘계단’의 장관에 압도당한 것이다.
주변을 둘러보던 에스데이 씨는 또다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한국의 경찰들이 떡 하니 버티고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건 진짜 사람이 아니라 최 씨가 제작한 설치미술이었다.
2007년 9월, 산티아고에 한국 현대미술의 바람이 불고 있다. ‘한국 현대미술 중남미 순회전’이 14일 산티아고 현대미술관에서 개막돼 11월 18일까지 두 달간의 대장정에 들어간 것이다. 한국의 국립현대미술관이 한국미술 세계화 프로젝트의 하나로 마련한 이 기획전은 중남미에서 한국 현대미술을 대규모로 선보이는 최초의 전시. 내년 5월엔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두 번째 순회전이 열릴 예정이다.
이번 전시엔 공성훈 박준범 서도호 송상희 오인환 이동욱 전준호 정연두 최정화 홍경택 씨 등 30, 40대 젊은 작가 23명의 설치 영상 사진 회화작품이 출품됐다. 국립현대미술관의 강승완 학예연구관은 “한국 현대미술의 역동적이고 실험적인 면모를 보여 주기 위해 젊은 작가 중심으로 전시를 꾸몄다”면서 “정치 문화적으로 격변의 시기를 거치면서 세상과 미술에 대한 젊은 작가들의 고뇌를 보여 주고 싶었다”고 기획 의도를 설명했다.
2층의 전시 공간은 정치 이데올로기에 대한 작가들의 생각을 표현한 ‘메이드 인 코리아(Made in Korea)’, 경제 성장과 도시화 속에서 인간의 일상이 어떻게 변해 가는지를 고민한 ‘뉴 타운 고스트(New Town Ghost)’, 대중 소비문화와 인간성의 문제를 성찰한 ‘플라스틱 파라다이스(Plastic Paradise)’의 3개 주제로 나뉜다.
칠레인들이 찬사를 보낸 대목은 한국작가들의 대담하고 풍부한 상상력과 새로운 실험 및 비판정신.
미술관 중앙홀을 장식한 서도호 씨의 ‘계단’은 지상과 천상을 이어 주는 듯한 분위기로 칠레인들에게 많은 생각의 기회를 제공했다. 전준호 씨의 영상미술 ‘지폐’도 강한 인상을 남겼다. 이 작품은 20달러짜리 미국 지폐에 나와 있는 백악관의 창문을 작가가 하나하나 지워 나가는 모습을 동영상으로 제작한 것이다. 이 시대 미국의 존재에 대해 생각해 보는 기회를 제공해 칠레인들의 호응을 얻었다.
이 같은 전시 작품에 대해 산티아고현대미술관의 프란시스코 브루노글리 관장은 “한국 작가들의 다양한 상상력, 새로운 시각예술의 혁신을 통해 세계의 중심으로 진입해 가는 한국 현대미술의 면모를 볼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한국 작가들의 현실 인식이 한국 상황에 머무르지 않고 세계적 보편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평가도 받았다. 이 미술관의 베아트리체 부스토스 전시코디네이터는 “한국 내의 로컬 이슈를 세계적인 글로벌 이슈로 발전시켜 작품으로 형상화하는 능력이 두드러진다”고 평가했다.
오인환 씨의 ‘남자가 남자를 만나는 곳’도 독특하고 철학적인 분위기로 칠레 사람들에게 강열한 인상을 남긴 작품. 잘게 부순 향의 가루를 전시실 바닥에 가득 깔고 거기에 마치 양각으로 조각하듯 칠레 사람들의 이름을 튀어나오게 만든 다음 그 글씨에 불을 붙여 나가는 작품이다. 초록 향 가루를 배경으로 사람의 이름만 회색 재가 되어가는 과정을 통해 삶과 존재에 대해 성찰하도록 해 주는 작품이다. 다양한 설치미술을 관람한 칠레인들은 오 씨의 작품을 보며 한국 현대미술의 또 다른 면모에 깊이 빠져들었다.
산티아고=이광표 기자 kpl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