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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문명 기자의 무비 다이어리]‘폴링다운’의 실직자

입력 | 2006-06-28 03:08:00

평범한 샐러리맨이 하루 아침에 도시를 휘젓는 광란의 범죄자로 변하는 상황을 통해 ‘일’에 대해 성찰하게 하는 영화 ‘폴링다운’. 동아일보 자료 사진


얼마 전 상영됐던 짐 캐리 주연 ‘뻔뻔한 딕 & 제인’은 코미디이긴 하지만 웃음으로 넘겨버리기엔 처절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가장이 다니던 회사가 하루아침에 부도가 나 중산층 가정이 하류층으로 급전직하한다는 내용이다. 미국영화이지만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은 줄거리다. 저축은 금세 바닥이 나고 남편은 이곳저곳에 이력서를 내밀지만 문전박대를 당한다. 급기야 막노동을 하다 불법 이민자로 몰리고 돈벌이에 나선 아내는 보톡스 화장품 실험대상이 되어 곱던 얼굴이 엉망이 된다. 집까지 차압당해 노숙자 신세가 된 가족들이 무료 식사 배급을 받는 장면은 섬뜩하기까지 하다. 부부는 마침내 강도로 돌변한다. 편의점을 시작으로 자신이 붙자 은행까지 턴다. 한번도 규칙을 어겨 본 적이 없던 정직한 사람들이 정당한 방법으로는 도무지 재기할 수 없다고 생각하자, 하루아침에 범법자로 추락하는 것이다.

‘영화적 과장’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현실은 영화보다 더 심하다. 4월 일본에서 40대 해고자가 초등학생을 아파트에서 내던진 사건은 국산 영화 ‘바람난 가족’에 나왔던 충격적 영상이 스크린 밖으로 튀어 나온 듯했다. 이런 무서운 현실들은 ‘고용 없는 성장’이란 무미건조한 말 뒤에 감춰진 ‘무서운 삶’을 짐작하게 한다.

이미 13년 전, 영화 ‘폴링다운(falling down)’에서는 실직의 고통을 한 남자를 통해 생생하게 보여준 바 있다. 샐러리맨들이 대규모 구조조정과 감원 태풍에 휘말려 있던 1990년대 초반 미국 경제의 이면을 보여 준 이 영화는 사람에게, 특히 남자에게 일이 어떤 의미인 지를 성찰하게 했다.

영화 도입부에는 극심한 교통 정체 속에서 진땀을 흘리며 운전석에 앉아 있는 중년 남자(마이클 더글라스)의 얼굴이 클로즈업된다. 그에겐 이날이 실직 한 달째다. 직장을 잃었지만 함께 사는 어머니에게도 ‘잘렸다’는 것을 말하지 않고 매일 와이셔츠에 넥타이를 매고 공원으로 출근했지만, 이날만큼은 모처럼 ‘일’이 있었다. 이혼한 아내가 키우고 있는 딸의 생일잔치에 참석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만 교통정체에 묶여 오도 가도 못하는 상황에 빠진 것.

마침내 그는 도로 한가운데에 차를 버리고 찌는 듯한 아스팔트 위를 걷기 시작한다. 귀를 찢듯 울려대는 경적소리에도 아랑곳없이 걸어가는 주인공의 이 자제심을 잃은 행동은 이후 심상치 않은 행보에 대한 전조다.

실직한 남자는 사람 구실을 못한다는 것을 이미 한 달 동안 체험한 그의 내면에는 분노와 수치, 모멸감뿐이었다. 차를 버린 뒤 전처에게 공중전화를 걸려고 들어간 구멍가게에서 주인이 잔돈을 바꿔 주지 않는다고 야구방망이로 때리고 가게를 엉망으로 만들어 놓는 것을 시작으로 멕시코 청년에게서 총까지 빼앗아 한낮의 도시를 휘젓고 다닌다.

영화에는 불과 한 달 전까지만 해도 평범한 샐러리맨이었던 한 남자가 직장을 잃은 후 하루아침에 도시를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는 광기의 범죄자로 변하는 모습이 디테일하게 그려져 과장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일’을 할 기회를 박탈당한 남자의 몰락은 영화 속 또 다른 남자(경찰관·로버트 뒤발)와 대비되어 인간에게 직업이란 것이 단지 생계수단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경찰관은 마침 그날이 정년퇴임하는 날이었다. 그동안 직장에서 그는 무능한 바보 취급을 당했지만, 이날 하루 광란의 범죄자를 잡는 수훈을 세움으로써 생애 처음 충만한 자신감을 느낀다. ‘일하는 즐거움’이란 바로, 그런 살아 있다는 존재감이다. 영화 속 두 남자의 운명을 가른 것은 한 사람에게는 직업이 있었고 한 사람에게는 없었다는 것이다.

더욱 슬픈 것은 일본의 소설가 시오노 나나미의 말처럼 “그런 엇갈린 운명이 ‘재능’과는 무관하다는 것”이다.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