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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너지 패권이 동맹을 바꾼다]유라시아의 블랙홀

입력 | 2006-05-15 03:00:00


《21세기 초엽의 에너지 경쟁은 냉전시대의 핵 대결을 방불케 한다. 에너지 자원 쟁탈을 위한 전 세계적 패권 경쟁으로 국제적 전략적 연대관계가 변화하면서 기존 ‘핵우산’의 자리에 ‘에너지우산’의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있다. 에너지와 안보는 이제 세계 질서를 바라보는 2개의 핵심 키워드가 됐다.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의 아제르바이잔, 아랍에미리트(UAE) 방문을 계기로 한국도 에너지 안보 전략에 시동을 걸었지만 뒤늦은 감이 없지 않다. 북카프카스와 중앙아시아는 새로운 에너지 패권 경쟁이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는 곳이다. 즈비그뉴 브레진스키 전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은 이곳을 유라시아 심장부의 ‘블랙홀’이라고 규정한 바 있다. 한국국방연구원(KIDA)과 동아일보는 4월 28일부터 5월 11일까지 14일 동안 ‘에너지 안보와 세계 동맹의 재편’이라는 주제 아래 에너지 패권 경쟁의 현장인 러시아와 이란, 카자흐스탄 등 3개국을 돌아봤다.》

유라시아의 ‘에너지 트라이앵글’인 러시아, 이란, 카자흐스탄 3개국 탐방에 나섰다. 모스크바행 비행기로 시베리아 평원을 가로지르는 동안 한 가지 생각에 매달렸다. 연일 고유가 사태와 자원 전쟁을 둘러싼 뉴스들이 지면을 채우고 있지만 과연 그 본질은 어디에 있는가.

셰레메티예보 공항에 내리면서 이번 방문 동안 “21세기 전반부 인류의 역사는 에너지 패권경쟁의 기록으로 채워질 것”이라는 평소의 확신을 하나하나 짚어보기로 마음을 정했다.

여장을 풀기 무섭게 만난 LG상사의 김승동 상무는 말했다. “미래를 보는 전략적 혜안 없이는 단·중기 계획마저도 세울 수가 없다. 대부분의 자원 강국들은 치밀한 전략을 세우고 지도자의 강력한 카리스마로 밀어붙이고 있다.”

러시아의 최근세사를 보면 21세기 에너지 패권경쟁의 핵심 요소들이 그대로 드러난다. 경제력 부족으로 미국과의 군비 경쟁에서 뒤처진 소련은 개혁 개방을 시도했지만 결국 국가 해체의 길로 접어든다. 1986년 들이닥친 유가 폭락이 결정적 원인이었다.

20년 후인 2005년 제2차 세계대전 승전 60주년 행사에 53개국 정상을 모아놓곤 강한 국가비전과 첨단 기술 잠재력을 과시할 수 있었던 것도 ‘유가’를 빼놓고는 설명하기 어렵다. 이번엔 유가가 러시아 편이었다. 한중일 3국과 에너지 게임을 벌이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얼굴에는 자원공급국 수장이라는 여유가 넘쳐난다.

중-러 전략 연대도 ‘에너지 공급과 무기 판매’가 두 축이다. 최근 러시아가 알제리와 90억 달러 상당의 계약을 성사시킴으로써 무기시장 중국의 가치는 한풀 꺾일 조짐이다. 그러나 에너지 동맹의 결속 고리는 앞으로도 상당 기간 견고할 전망이다.

아프가니스탄전쟁과 이라크전쟁을 치르면서 미국과 러시아가 동맹 재편을 둘러싸고 벌인 시소게임의 중심축 역시 에너지였다.

선수를 친 것은 미국이었다. 강한 군사력과 테러와의 전쟁을 내세워 전통적으로 러시아의 앞마당이었던 북카프카스와 중앙아시아를 군사기지 벨트로 묶어나갔다. 루마니아와 불가리아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 가입했고, 그루지야를 시작으로 우즈베키스탄과 키르기스스탄에까지 미군 기지가 들어섰다. 그 이면에는 바쿠-트빌리시-제이한(BTC) 라인을 포함한 송유관과 군사협력을 교환하는 이해관계가 자리했다.

미국의 유라시아 행진은 이라크에서의 고전으로 제동이 걸렸다.

그 사이 중국은 폭증하는 외환 보유액을 무기로 동남아와 중동, 아프리카를 상대로 무차별 자원 사냥에 나섰다. 한국석유공사 모스크바사무소의 신석우 소장은 “중국이 입찰에 참여했다는 소식만으로도 경쟁국들은 의욕을 잃을 정도였다”고 말한다. 고유가를 틈타 경제자립도 올리기에 조급해진 독립국가연합(CIS) 국가들에 중국은 매력적인 경제지원국으로 부상할 수밖에 없었다.

유라시아 남단의 미얀마, 파키스탄, 방글라데시는 중국과 손잡고 해군기지를 공동 건설하는 파격적인 조치를 단행했다. 중국의 지원으로 방글라데시의 치타공 항구가 건설 중이고, 파키스탄의 과다르 항, 미얀마의 코코아일랜드 일대에 기지가 들어섰다. 미얀마 내륙에 건설된 철로와 도로는 중국 윈난(雲南) 성으로 이어져 중국의 오랜 염원 중의 하나인 태평양과 인도양을 아우르는 ‘이양(二洋) 전략’ 실현도 이제 가시권에 들어 왔다.

미국으로선 남방 수송로를 지배하는 제7함대의 위상 추락을 관망할 뿐이고, 중국으로서는 말라카 해협에 죄고 있던 목줄을 풀기 시작한 셈이다. 또한 카자흐스탄 아타수(Atasu)와 중국 아라산커우(阿拉山口)를 잇는 파이프라인도 전장 240km의 1차 공사를 마치면서 중국은 서기동수(西氣東輸· 서부 신장웨이우얼 자치구 등에서 생산된 천연가스를 가스관을 통해 상하이까지 공급하는 사업)의 현실화에 성큼 다가섰다.

북카프카스와 중앙아시아에서도 변화의 조짐은 나타나고 있다. ‘색깔혁명’으로 불리는 시민 봉기의 도미노현상으로 친미 색채가 뒤덮는 듯했던 이 지역에서 러시아의 입김이 새삼 커지기 시작했다. 에너지 강국으로서의 힘 때문이었다.

2006년 새해 벽두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상대로 도발한 가스전쟁은 야심 찬 패권 행진의 전주곡에 불과하다. 알마티에서 만난 카자흐스탄국립대의 김상철 교수는 “러시아는 머잖아 친미 성향의 그루지야에 대해서도 가스 공급 중단 압박을 시도할 것”이라 전망했다.

현재 그루지야에는 러시아 해군기지와 미국 군사기지가 공존하고 있다. 양국의 영향력이 직접 충돌하는 접점이다. 그루지야가 어떤 선택을 하든 의미심장할 수밖에 없다.

국제질서는 ‘총소리 없는 자원전쟁’의 에너지 패권경쟁 시대로 접어들었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는 국제질서 패러다임의 변화를 ‘고유가로 인한 일시적 현상’으로 치부하려는 안이한 인식이 여전히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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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우디, 러-中과 가까이

美중심 중동 에너지질서 변화▼

사우디아라비아와 중-러 간의 밀착만큼 패권 경쟁 구도의 변화를 극명하게 보여 주는 사건도 없을 것이다.

9·11테러 이전까지 사우디는 미국의 중동 교두보였다. 미국의 이라크전쟁은 중동을 중심으로 한 에너지 질서 재편의 서막일 뿐이었다. 이스라엘 베사 전략연구소장 에프라임 인바 박사는 2002년 말 “사우디는 이미 중동의 변방국가로 전락하기 시작했다”고 진단한 바 있다.

그 후 불과 3, 4년 사이 사우디의 대외정책은 미국에서 중-러 양국으로 축을 옮겨가고 있다. 사우디의 압둘라 빈 압둘아지즈(사진) 국왕은 지난해 러시아와 무기 공급협정을 체결한 데 이어 올 1월 중국과 에너지 협력 의정서에 서명했다. 자원 공급과 군사 협력을 양대 축으로 한 사우디의 기조 조정은 국제 동맹질서의 미묘한 변화를 투영하고 있다.

사우디와 러시아가 에너지우산을 받쳐줌으로써 중국이 유라시아 동쪽과 서쪽으로 관통하며 형성하고 있는 준(準)동맹관계는 미국의 초강국 지위를 위협하는 양상으로 발전하는 듯하다. 더욱이 이란과 베네수엘라는 반미연대 조성을 공식화했다.

▼권력 최측근의 뜻대로

러시아 이고리 세친, 자원국유화 주도▼

러시아와 이란, 카자흐스탄에선 권력자의 최측근이 에너지 정책을 독점하고 있다. 이들은 예외 없이 강성 인물들이다.

러시아에는 상트페테르부르크대 출신인 이고리 세친(사진) 크렘린 행정부실장이 푸틴 대통령의 분신처럼 움직이고 있다. 45세의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푸틴 대통령의 절대적 신뢰와 저돌적인 추진력으로 자원 국유화를 주도하고 있다.

카자흐스탄에는 최근까지도 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 대통령의 둘째사위가 국영석유업체 KMG의 부사장직에 있었다. 입김이 강할 수밖에 없다. 그러다 보니 카자흐스탄의 블라디미르 시콜니크 에너지광물부 장관은 자원협정을 희망하는 국가들에 배짱을 튕긴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들은 카자흐스탄을 움직이는 3대 족벌 출신이거나 그들과 깊은 유대를 맺고 있다.

이란의 마무드 아마디네자드 대통령도 측근을 석유장관으로 기용하려 했고, 이 때문에 여러 차례나 혁명수호위원회의 거부권 행사에 부닥치는 진통을 겪었다.

권력층은 이처럼 ‘에너지 권력’을 정권 강화 기반으로 삼고 있다. 한국을 포함한 에너지 수입국들의 고민은 더욱 복잡해질 수밖에 없다.

공동취재

△김재두 국방연구원 이라크 팀장

△심경욱 국방연구원 책임연구위원

△이철희 동아일보 국제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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