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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인준 칼럼]경제, 病名 외친다고 치료되나

입력 | 2006-01-03 03:03:00


한덕수 경제부총리가 그리스신화를 인용해 경제가 잘될 것이라는 믿음을 피력했다.

키프로스 섬의 왕 피그말리온은 상아로 여인상을 조각해 날마다 꽃을 바치며 사랑했다. 그리고 소원을 비는 축제일에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에게 조각을 인간으로 만들어 달라고 간청해 뜻을 이뤘다.

어제 신년사에서 한 부총리는 말했다. “강한 희망은 현실로 이루어진다는 피그말리온 효과를 월드컵과 외환위기 극복에서 경험했다. 올해 우리 모두가 정성을 다하고 간절히 소망하면 어떤 꿈과 목표도 이룰 수 있다.”

국민이 노무현 정부 3년간 피그말리온 효과를 보지 못한 것은 간절한 소망이 없었던 탓은 아니다. 실업자들은 꿈속에서도 일자리를 찾아 헤맸을 것이고, 자영업자들은 가게 문을 닫지 않게 해 달라고 절규했을 것이다.

그러나 빈곤층이 늘고 중산층의 삶도 더 힘겨워졌다. 정부는 해마다 투자 활성화와 일자리 창출을 외쳤지만 피그말리온 효과는 나타나지 않았다. 조금 여유 있는 계층은 갈수록 무거워지는 세금에 부글부글 끓지만 그렇다고 분배가 개선된 것도 아니다.

뚜렷해진 것은 양극화다. 2% 때려서 98% 잘되게 해 준다는 말의 플라세보(가짜 약) 효과도 사라진 듯하다. 피그말리온 효과건, 플라세보 효과건 믿음이 있어야 기대할 수 있다. 정부나 국민이나 그런 효과의 환상에서 벗어날 때가 됐다.

경제와 민생이 꼬이는 원인을 정부도 국민도 ‘깨닫고, 인정하고, 제거해야’ 비로소 희망과 믿음을 회복할 수 있다. 꿈과 목표가 아무리 간절해도 효과적인 수단과 방법을 거부하면 신화는 현실이 되지 않는다.

노 대통령은 신년사에서 “새해에는 서민 여러분의 형편이 한결 나아질 수 있도록 집중적인 노력을 기울여 나가겠다”고 했다. 이해찬 국무총리는 어제 시무식에서 경제 활성화, 양극화 해소, 국민 통합이 올해 중점 과제라고 했다. 늘 강조했지만 이루지 못했으니 또 말하게 되는 모양이다.

문제는 이런 목표를 이룰 수 있는 수단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국내 투자와 소비를 살리고, 일자리를 늘려야 한다는 생각은 정부와 다수 국민이 같다. 여기서도 ‘어떻게’라는 방법이 문제다.

대기업과 부자들의 목을 비틀어서? 그런 수법으로는 안 된다는 사실이 3년간에 확인됐다. 경쟁을 막고 평등의 미신을 국교(國敎)로 삼아서? 대한민국을 통째 뒤집지 않는다면 불가능하다. 실제로 뒤집기에 성공한다면 나라가 쭉정이로 변한 뒤일 것이다.

매일경제신문과 동아시아연구원이 국내의 대표적 경제학자 100명에게 ‘경기 부진의 원인과 책임 소재’에 대해 물었다. 복수응답 결과는 이렇다. ①지역균형 및 분배 중시 경제 노선(45.5%) ②경제부처의 정책 실패(43.9%) ③집권 정치권과 경제부처 간 갈등(31.8%) ④노사관계 불안정(24.2%) ⑤ 시민단체·이익단체의 발목 잡기(18.2%) ⑥유가 등 대외여건 악화(12.1%) ⑦사회안전망 미비에 따른 소비 위축(6.1%) ⑧일부 언론과 보수세력의 왜곡 및 여론 호도(4.5%)

다음은 동아일보가 경제 전문가 100명에게 ‘정부가 새해 우선적으로 추진해야 할 경제정책 과제’를 물은 데 대한 복수응답 결과다. ①규제 완화(54%) ②반기업정서 해소(36%) ③상생적 노사관계 정립(35%) ④사회 양극화 해소(25%) ⑤서비스산업 활성화(19%) ⑥국가균형발전 전략(9%) ⑦대외개방 가속화(6%) ⑧사회안전망 강화(4%)

한국일보 여론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62.1%가 ‘한국 사회 발전에 기여한 집단’으로 기업(대기업 44.6%, 중소기업 17.5%)을 꼽았다. 청와대와 행정부라고 답한 사람은 각각 1.4%와 1.1%였다.

교수신문이 대학교수 195명에게 새해의 소망을 담은 사자성어를 고르라고 했더니 가장 많은 33%가 약팽소선(若烹小鮮)을 택했다. ‘나서기보다 돼가는 것을 지켜보는 것이 가장 좋은 정치’라는 뜻이다.

정부와 정치권, 시민단체와 노조, 그리고 다수 국민이 기업과 시장을 적극 응원할 생각이 없다면 ‘약팽소선’의 참을성이라도 보이는 것이 경제의 피그말리온 효과를 조금이나마 기대할 수 있는 길이 아닐까 싶다.

배인준 논설실장 injoo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