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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예술]시계가 걸렸던 자리

입력 | 2005-11-05 03:07:00

구효서 씨는 “20년 가까이 소설을 써 왔다. 소설이 뭐냐고 묻는다면 바람이라고 말하겠다. 지금까지 쓴 소설들을 한 줄로 늘어 놓으면 바람소리가 들릴 것 같다”고 말했다. 사진 제공 창비


◇시계가 걸렸던 자리/구효서 지음/286쪽·9500원·창비

“내가 한국에서 썼던 이름은 은혜였다. 영국서 살다가 이라크로 건너가 반전 활동을 해왔는데 들판에서 차가 뒤집어졌다. 얼이 빠져 근처의 이라크 사람 집 문을 두드렸는데 문턱을 넘어서면서 ‘마침내 이곳에 왔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곳 가족들은 차분하면서도 따뜻했다. 가족들은 4년 전 시위하다 숨진 딸이 살아있다면 나랑 같은 스물여섯 살이라고 했다. 딸의 생일이 오늘이었다. 딸의 옷가지 같은 것들이 집안 곳곳에 남아 있었는데 딸 이름이 ‘카산드라’라고 했다. 바로 내 영어식 이름이었다.”

구효서 씨의 8번째 단편집 ‘시계가 걸렸던 자리’에 들어있는 ‘앗쌀람 알라이 쿰’은 이런 식으로 이어진다. 제목은 ‘평화가 당신에게’라는 이라크 말이다. 구 씨는 지금까지 “중편과 단편을 한 100편쯤 쓴 것 같다”고 말했다. 그 작품들은 지극히 사회적인 관심을 드러낸 리얼리즘 계열의 것부터, 개인 속으로 들어간 모더니즘의 것들까지 참 다양한 내용을 담고 있다. 이번 작품집에는 죽고 사는 것, 탄생과 소멸에 관한 이야기들이 강한 이미지를 남기고 있다. 타이틀 작품 ‘시계가 걸렸던 자리’는 소설 문학의 영원한 테마인 그 같은 이야기들을 눈부시도록 아름다운 문체로 그려 놓은 수작이다.

위암 말기 통보를 받고 이제 남은 생애가 얼마만큼인지 가늠할 수 있게 된 마흔여섯 살의 사내가 마지막으로 원하는 것은 “그렇다면 내가 태어난 때는 언제인가”라는 것이다. 이미 돌아가신 어머니는 날짜는 알고 있지만 시(時)는 “뒤꼍 문턱에 아침 햇빛이 비칠 무렵”이라고만 말했다. 그는 이제 어깨 다친 사람처럼 처마가 내려앉고, 빗물 고인 마당에 잡풀과 야생화가 피어 있는 텅 빈 옛집을 찾아간다. 문턱을 보기 위해서다.

죽는다는 건 무엇인가. ‘시계가 걸렸던 자리’를 넘어가는 것이다. 분침과 시침이 가리키는 시간 뒤편의 무한으로. 사내는 그 무한 속에 살고 있는 것들을 바라본다. “나는 맘속으로 조용히 문 밖의 과꽃을 향해 물었다. 맨드라미를 향해 물었다. 혹시 네가 나 아닐까. 햇살과 바람과 하늘에 물었다. 혹시 네가 나 아닐까. 너희들이 나라면 나는 언제 어디에고 있을 수 있을 텐데.”

단편 ‘소금가마니’는 부엌 뒤쪽 어두운 헛간에 언제나 셋씩, 마치 삼존불처럼 모셔져 있던 소금가마니에 대한 이야기다. 정확히는 소금가마니에서 스며 나온 짜고 쓴 간수로 두부를 만들어내던 ‘나’의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다. 빗물이나 바람처럼 아무런 이름도 없이 살다가 세상을 마감하는 이들에게 삶이란 무엇일까. 비열하고 이기적인 남편한테서 걸핏하면 짓이겨지고 내던져진 어머니. 일자무식처럼 보였던 그 어머니가 키르케고르의 ‘공포와 전율’ 일본어판을 읽고 있었다는 걸 돌아가시고 나서야 알았다면, 나는 도대체 어머니의 삶을 어디까지 알고 있었던 것일까. 이런 의문에서 시작하는 ‘소금가마니’는 비천했지만 자애로웠고, 가냘팠지만 강인했던 한 여인의 삶과 죽음을 작은 군더더기도 없이 그려내고 있다.

권기태 기자 kk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