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9월 16일 인터넷신문 ‘우크라이나 프라우다’의 게오르기 곤가제 편집국장이 사라졌다. 그는 퇴근길 친구 집에 들른 뒤 행방이 묘연해졌다.
두 달 뒤 그의 시신이 발견됐다. 목이 잘리고 염산에 살이 타서 시신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다. 부검 결과 그는 살아 있는 상태에서 목이 잘린 것으로 드러났다.
정부기관이 그를 암살했다는 소문이 번져나갔다. 그는 레오니트 쿠치마 당시 우크라이나 대통령의 부패와 독재를 비판하는 칼럼으로 이름을 날렸다.
소문은 곧 진실로 확인됐다. 핵폭탄급 위력을 가진 비밀 도청 테이프가 야당 진영에 의해 공개됐다. 테이프에서는 대통령의 격앙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곤가제를 없애 버려. 그는 요주의 인물이야. 쥐도 새도 모르게 납치해서 처치해 버려.”
시민들은 분노했다. 대통령이 주도하는 개혁의 이면에는 거대한 반(反)언론 공작이 진행되고 있었다.
1994년 쿠치마 대통령 취임 이후 6년 동안 곤가제 외에도 10여 명의 언론인이 의문의 죽음을 당한 것으로 밝혀졌다. 유럽안보협력기구(OSCE)는 곤가제 사건을 ‘살인 검열(censorship by killing)’이라고 비난했다.
2001년 우크라이나는 시위로 물들었다. 1991년 옛 소련에서 독립한 뒤 가장 큰 반정부 시위였다. 수도 키예프는 거대한 천막촌으로 변했다. 수만 명의 시민은 천막에서 기거하며 시위 장기전에 들어갔다.
쿠치마 대통령은 국내외에서 밀려드는 퇴진 압력을 무시하고 무력진압 총공세를 펼쳤다. 시위대는 해산되고 시위 지도자들은 체포됐다. 2003년 그는 헌법을 뜯어고쳐 집권 연장을 노렸다. 우크라이나의 시민혁명은 실패로 끝나는 듯했다.
그러나 우크라이나 국민은 잊지 않았다.
2004년 총선에서 민주 세력들은 ‘오렌지 혁명’을 이끌며 쿠치마 대통령의 후계자에게 패배를 안겨 줬다.
야당 후보였던 빅토르 유셴코의 당선은 쿠치마 대통령에게 보내는 우크라이나 시민들의 엄정한 심판이었다.
유셴코 대통령은 가장 먼저 곤가제 사건 재조사를 지시했다.
역사는 돌고 도는 것인가. 그런 유셴코 대통령도 측근들의 부패와 권력타툼 등 전임 쿠치마 대통령과는 다른 이유로 위기를 맞고 있다.
정미경 기자 micke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