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트렌드 생활정보 International edition 매체

[독자의 인권을 생각합니다]자살사건 보도와 인권침해, 알권리

입력 | 2004-12-08 18:18:00

왼쪽부터 문혜진 위원, 이영모 위원장, 유의선 위원, 장용석 위원. 박주일 기자


《우리 언론의 자살사건 보도에 문제는 없는가. 동아일보 독자인권위원회는 7일 오후 본사 14층 회의실에서 제20차 정기회의를 열고 ‘자살사건 보도와 인권 침해, 알 권리’를 주제로 토론을 벌였다. 독자인권위원들은 자살도 일종의 사회적 병리 현상이라는 점에서 일회성 보도에 그치지 말고 심층 분석을 통한 기획성 보도로 근원적 치유책을 마련하는 데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강조했다.

―자살사건 보도에는 신중하지 못한 표현이나 접근 자세가 자주 보입니다. 자살 방법이나 약품명, 치사량을 구체적으로 알 수 있게 하는가 하면 유서 내용을 분별없이 공개하기도 하고 주변 인물이나 경찰의 말을 빌려 자살 동기를 단정적으로 보도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와 관련해 언론중재위원회는 ‘시정권고 심의기준’을 마련해 각 언론사가 기사 작성에 참고하도록 했습니다. 자살 보도에서 나타나는 문제점을 우선 짚어봐 주시지요.

▽이영모 위원장=자살 보도에 관한 언론중재위원회의 ‘시정권고 심의기준’ 제10조는 지나치게 원론적이고 추상적입니다. 권고내용 자체가 ‘과잉’이라는 느낌을 줍니다. 이 기준이 오히려 독자의 알 권리를 훼손하고 언론의 사회적 책임을 포기하게 하지나 않을지 우려됩니다. 일단 보도해야 할 사건이라고 판단했다면 적어도 독자들이 사실관계를 알 수 있게 써야 하겠지요. 물론 당사자나 유족들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는 범위에서 말입니다.

▽유의선 위원=자살 보도에서는 흔히 네 가지의 문제점이 나타납니다. 첫째는 흥미 유발을 겨냥한 선정 보도, 둘째는 자살 동기에 대한 추정 보도로 자살에 이르기까지 얽힌 복잡한 요인들을 무시하는 경향입니다. 이런 현상은 특히 제목의 선정성에서 두드러집니다. 셋째는 ‘정서적으로 이해한다’는 식의 접근으로 자살을 영웅시 또는 미화하거나 자살의 구실을 합리화, 정당화하는 듯한 사례가 되겠지요. 최근 사례를 보면 수사반장, 대입수험생, ‘기러기 아빠’의 자살 등이 있습니다. 끝으로 자살의 방법, 즉 자살 안내 사이트의 주소를 써주거나 자살에 사용된 약품 이름과 치사량, 자살 장소 등을 자세하게 묘사해 자살을 부추기는 듯한 보도가 있겠습니다.

▽장용석 위원=흥미 위주의 선정적인, 이른바 ‘타블로이드판 보도’를 지양해야 한다는 점은 공감합니다. 하지만 자살이 사회병리 현상을 반영하고 있다고 판단되면 그 동기나 원인에 대한 적극적 분석 보도를 통해 예방과 치료의 모티브를 제공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자살 보도의 지나친 자제 역시 언론의 역할을 다한다고 볼 수 없지 않을까요. 일회성 사실 보도에 그치지 말고 자살에 숨겨진 복합적 원인들을 찾아내 분석함으로써 사회적 치유 방안을 제시해주면 좋겠습니다.

▽문혜진 위원=당사자나 유족의 입장을 감안하지 않은 선정적인 추정 보도가 가장 큰 문제라고 봅니다. ‘생활고 비관 동반자살’ 등의 단정적인 보도 사례가 잦은데, 사실을 확인해보면 보도 내용과 다른 점도 상당수 발견됩니다. 이 경우 자칫 유족들에게 회복 불가능한 낙인을 찍어버리는 결과를 낳기도 하지요. 때로는 경찰의 발언을 인용해 ‘추정된다’는 식으로 책임을 피해 가려는 경향마저 눈에 띄는데, 당사자나 유족의 사생활 및 명예에 미칠 여파를 반드시 유념해야 합니다.

▽유의선=자살만큼 흡인력을 가진 기사도 드물다고 봅니다. 그래서인지 제목을 유난히 강하게 뽑는 경향이 있어요. ‘너무 힘들다… 집 나가 음독’ ‘수능 못봐 죄송, 고3 한강 투신’ 등의 부정적 단정적 표현을 사용한 제목보다는 ‘목숨 경시 풍조’ ‘어처구니없는 자살’ 등 계도적인 방향으로 표현해주는 편이 낫다고 봅니다. 현실적으로 기사의 가독성은 떨어질 수도 있겠지만 사회병리 현상에 대한 예방과 치료에 초점을 맞춰 모방자살을 방지하려는 사회적 책임이 요구됩니다.

▽장용석=‘자식에게 짐 되기 싫어… 노인 자살’이라고 한마디 던지기보다는 노인복지 정책을 깊이 있게 파헤친다거나, ‘동반자살 불사한 비정한 모정’을 단순하게 전달하기보다는 사회복지 정책을 진지하게 짚어보는 기획 기사가 바람직합니다.

―독자의 알 권리나 공익 우선의 원칙을 적용해 자살사건에 대한 보도 범위를 더욱 폭넓게 허용해야 할 필요도 있다고 봅니다. 사회적으로 파장이 큰 부정부패 사건의 장본인이나 사회 저명인사 또는 고위 공직자 등의 자살사건은 공공의 관심도가 높다는 측면에서 보통 사람들의 자살과는 달리 취급해야 하지 않을까요.

▽이영모=개인의 사생활 보호도 중요하지만, ‘꼭 봐야 되겠다’는 공익이 앞설 때는 자살사건도 충분히 보도하는 것이 언론의 기능에 합당하다고 봅니다. 정도의 문제는 있겠지만 당사자가 공인(公人)이라면 자살 동기를 비롯해 독자들이 기대하는 정보 욕구를 충족시켜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반면 사인(私人)의 자살사건 보도는 자제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예를 들어 생활고 비관 자살 사례를 매일같이 자세하게 보도한다면 그러잖아도 어려운 시기에 오히려 자살을 부추기는 부작용을 불러올 수도 있으니까요.

▽문혜진=어찌 보면 선정성은 곧 궁금증과 통하는 것 같습니다. 우울증에 시달리던 부유층 주부가 자살했다면 기사가 안 되겠지만, 생활고를 비관한 보통의 주부나 외로움을 견디다 못한 ‘기러기 아빠’의 자살 등은 독자들의 관심도가 높다고 봅니다. 이런 사회적 문제가 되는 현상에 대해 독자는 당연히 알 권리를 갖는다는 점에서 보도가 이를 충족시켜야 마땅하다고 봅니다.

▽장용석=언론의 적극적인 기능을 한 번 더 강조하고 싶습니다. 생활고 비관 동반자살이 빈발하는 현상을 보인다면 이는 국가의 생계보장 예산의 배정 문제와 직결됩니다. 이에 대해 언론이 문제를 제기한다면 독자가 문제의식을 공유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결과 생계보장 예산이 확대될 수도 있고, 그렇지 못하더라도 나중에 선거 때 반영할 수도 있으니 나름대로 순기능을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이런 기능은 정부도 국회도 할 수 없고 오직 언론만이 할 수 있다는 점에서 더욱 절실한 대목입니다. 아이디어 차원에서 덧붙인다면 자살사건을 보도할 때 자살방지 상담단체의 연락처를 함께 안내하는 것은 어떨까요.

▽이영모=경찰의 자료를 보니 지난해 자살자 수가 약 1만3000명이라고 합니다. 의외로 많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습니다. 하루 평균 35명을 넘어서는 셈입니다. 종합적인 분석으로 나름대로 치유방법을 제시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유의선=전적으로 공감합니다. 정책 당국의 반응을 이끌어낼 수 있도록 끝까지 추적하는 저력이 요구됩니다. 나아가 자살의 대안을 제시하는 방법도 연구할 필요가 있습니다. 단순 보도를 넘어서 가치관을 전환시키려는 노력도 함께 기울여주면 좋겠습니다.

정리=김종하 기자 1101h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