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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포츠]산악인 오은선씨 "그를 두고와서… 미안합니다”

입력 | 2004-06-01 18:34:00


“미안합니다.”

한국여성으로는 최초로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8850m)를 단독등정하고 돌아온 산악인 오은선씨(38·영원무역·수원대 산악회 OB)는 만나자마자 이 말부터 꺼냈다. 조난 사고로 목숨을 잃은 계명대 산악부 박무택 대장(36)의 시신을 발견하고도 그대로 놔두고 돌아와야 했던 게 두고두고 가슴 아팠기 때문.

오씨는 지난달 20일 에베레스트 북동릉 루트 중에서 가장 어렵다는 해발 8750m의 세컨드스텝을 올라서자마자 박 대장의 시신을 발견했다.

“다가갈 수 없는 암벽 위 로프에 숨진 채 매달려있는 박 대장을 보는 순간 울컥 눈물이 쏟아졌어요. 그래도 얼굴은 편안해 보였습니다.”

오씨는 이 사실을 베이스캠프에 알린 뒤 계속 정상을 향해 올라갔다. 그냥 내려갈까 생각도 했지만 그래도 정상에 오르는 것이 산악인의 도리라고 믿었기 때문.

오씨가 박 대장 일행의 조난소식을 들은 것은 지난달 18일 오후 3시경. 당시 마지막 캠프인 해발 8300m 지점의 캠프5에 있던 그는 설맹(눈에서 반사되는 햇빛으로 각막이나 결막에 염증이 생겨 앞이 안 보이는 현상) 때문에 캠프까지 내려갈 수 없다는 박 대장의 무전연락을 받았다.

2차 공격조로 캠프에 함께 있던 백준호씨(37)가 정상 도전을 포기하고 박 대장을 구하러 간다고 나섰다. 오씨는 2차 사고가 날까봐 말리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는 상황이어서 자신의 산소통 등 장비를 백씨에게 내줬다.

지난달 20일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 정상에 선 여성산악인 오은선씨. 그는 정상 도전 중 함께 원정간 박무택 계명대 등반대장의 시신을 발견하기도 했다. 이번 등정으로 세계 7대륙 최고봉 중 4개 정상에 선 그는 올 8월 아프리카 최고봉인 킬리만자로에 도전한다. 사진제공=오은선

이틀 동안 캠프5에 대기하고 있던 오씨는 20일 혼자 정상 도전에 나섰다. 강추위에 산소가 희박한 곳에서 이틀 동안 지샌 몸은 이미 지칠 대로 지친 상태. 개당 10kg씩이나 되는 산소통을 두개나 짊어지고 오르던 오씨는 끝내 산소통 한 개를 버렸다. “나중에 어떻게 되든 너무 무거워 어쩔 수 없었다”는 것.

출발 11시간 만에 정상에 올랐다. 10분간 정상에 머물다가 내려왔지만 30분도 안돼서 산소가 바닥나버렸다. 정신이 아득한 상태에서 내려오느라 보통 3∼5시간 걸리는 캠프 5까지 11시간이나 걸렸다고. 멀리 캠프5 불빛이 보일 무렵 기진해 주저앉고 말았지만 다행히 타국 원정대 셰르파의 눈에 띄어 텐트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를 기다리기로 했던 셰르파는 기상 악화를 이유로 하산해버린 뒤.

이번 에베레스트 등정으로 오씨는 세계 7대륙 최고봉 중 4개째 정상에 올랐다. 앞으로 남은 봉우리는 아프리카 최고봉 킬리만자로(5963m)와 오세아니아 카스텐츠(4884m), 남극의 빈슨매시프(4897m). 오씨는 올 8월 킬리만자로에 도전하고 나머지 2개봉은 내년에 원정을 떠날 예정.

“며칠 전 인수봉에서도 사고가 나 생명을 잃었잖아요, 인생이란 그런 것 같아요. 그래도 어려운 상황일수록 용기를 내야죠.”

죽음의 문턱까지 다녀온 오씨는 산에서 인생의 의미를 터득한 모양이다.

전 창기자 jeo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