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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푸른 바다서 길어올린 '무지개 빛' 김유선 자개 작품전

입력 | 2003-09-25 17:21:00


서울 종로구 동숭동 김유선씨(36·사진)의 작업실에는 붓과 물감 대신 천연 자개 조각들이 쌓여 있다. 흔히 자개하면 전통가구의 재료로만 알고 있지만 원형이나 육면체에 공들여 붙인 김유선의 자개작품은 전통과 현대, 수공과 자연이 어우러진 독특한 맛을 낸다.

그의 작업에는 한 치의 오차도 허용되지 않는 장인정신이 필요하다. 작품제작은 조개, 소라, 전복 등 어패류 껍질을 수십 번 깎아 수압이 센 물칼로 종이장보다 얇게 썬 뒤 잘게 조각내 접착제로 붙이는 과정으로 진행된다. 그는 끊음질 등 다양한 전통 자개공예기법을 독학으로 배우며 10여 년 간 자개작업에 몰두해 왔다.

●소라-조개 껍데기로 10년간 수공작업

전시회에 선보인 김유선의 ‘무지개 프로젝트’. 어둠속에서 빛을 발하는 자개 작품은 점차 설 자리를 잃어가는 ‘손맛’ 에 대한 그리움을 불러 일으키며 오랜 동안 바닷속에서 숙성된 시간의 흔적을 느끼게 한다. 사진제공 카이스 갤러리

이화여대와 파리에서 서양화를 공부한 그가 자개와 만난 것은 91년. 우연히 서울 왕십리의 뒷골목을 걷다가, 한 자개가구 공장에서 쏟아져 나온 부스러기들을 보고 깜짝 놀랐다. 햇볕을 받아 빛나는 오색찬란한 자개들이 그에게 영감을 주었다.

“그때 나는 끊임없이 빛에 대한 표현을 갈망했었습니다. 물감으로는 도저히 안 되겠다는 절망에 사로잡혔을 때 자개를 만났는데, 내가 만들려는 인공적인 빛이 얼마나 보잘 것 없었나 하는 생각과 함께 ‘바로 저거다!’ 하는 깨달음이 들었지요.”

그가 ‘빛’이라는 화두를 붙잡고 몰두해 온 밑바탕에는 슬픈 개인사가 스며 있다.

“일곱 살 때, 동생을 갑자기 병으로 잃고 난 후 죽음에 대한 공포가 일찍 각인됐던 것 같아요. 유난히 저랑 친한 동생이었는데, 하루아침에 갑자기 사라졌다는 현실이 이해가 되지 않았지요. 어린 나이에도, 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곧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곤 했어요.”

어둠에 대한 공포와 빛에 대한 갈망이라는 무의식은 그가 업(業)으로 선택한 그림에 그대로 반영됐다. 여기에 서양화를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 쯤 고민하듯, 서양적 재료와 기법에 대한 회의도 생겼다. 파리 유학을 떠날 때의 야망과 도전의식은 사라지고 의기소침과 무력감을 안고 서울에 돌아왔다고 자책할 무렵, 그는 우연히 ‘자개’를 통해 작업에 일대 전환을 이룬 것. 남들 눈에는 그저 아름다운 재료의 하나로 보였던 것이 자신에게는 삶에서 가장 절실한 재료가 된 것이다.

그러나 수공 작업은 쉽지 않았다.

“기법을 처음부터 배워야 하는 데 배울 사람도 없고 혼자 공부하면서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었지요. 어렵긴 했지만, 워낙 재료에 대한 사랑이 있었기 때문인지 갈수록 오기가 생기고 힘이 나더라고요. 그때 생각했습니다. ‘절실함’은 전문성을 뛰어 넘는다고 말이지요.”

오히려 자개가 그를 변화시켰다. 정직과 인내를 요구하는 자개작업을 통해 인내와 성숙, 느림의 가치를 배웠다. 또 지저분하고 더러운 어패류 껍질이 아름다운 형상으로 변하는 모습을 보면서 이 세상 모든 하찮은 존재들도 사랑과 절실함이 있으면 눈부시게 변신할 수 있다는 안목도 생겼다.

●자연이 빚어내는 수천가지 빛 담아내

김유선의 '레인보우1'

그는 26일부터 10월25일까지 서울 카이스갤러리(02-511-0668)에서 자개그림 15점을 선보이는 ‘무지개 프로젝트’를 연다. 직경 2m가 넘는 신작 ‘무지개’를 비롯한 다양한 작품들이 선보인다. 빛의 변화에 따라, 심지어 어둠 속에서도 수백 수천 가지 빛을 발하는 그의 작품은 점차 설 자리를 잃어가는 ‘손맛’에 대한 그리움과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여기에 자개가 던져주는 바다 속 상상과 시간의 흔적에 대한 생각들도 떠오른다.

독실한 기독교인인 작가는 ‘무지개 빛을 온 누리에’란 철학으로 여러 곳에 작품을 기증하고 있다. 6월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 고아원에 작품을 기증했으며 18일 개막한 하와이 이민 100주년 기념 ‘한국 작가 교류전’에 참가하면서 호놀룰루 한인 양로원에도 작품을 기증했다. 2005년 경기 여주에 완공되는 우리나라 최초의 민영 교도소에도 그의 작품이 걸릴 예정이다.

허문명기자 angelhuh@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