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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하기 힘든 나라]기업과 시민, 함께 가는 길

입력 | 2003-08-21 18:08:00


《1995년 10월 영국 동부의 클리블랜드 윈야드. 삼성전자는 TV와 전자레인지 등 복합전자공장 준공식을 했다. 영국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직접 준공식에 참석해 삼성전자가 영국에 공장을 세워 준 것을 치하하고 “어려운 점이 있으면 꼭 알려 달라”고 당부했다. 삼성전자 공장이 있는 거리는 아예 '삼성 애버뉴' 라고 이름을 바꿔 주었다. 당시 준공식에 참석했던 삼성 관계자의 회고.

“영국 진출 첫 해에는 당연히 적자를 볼 줄 알았다. 그런데 뜻밖에도 이익이 났다. 알고 보니 공장 설립 첫 해 각종 세제 감면혜택을 주면서 근로자에 지불한 임금의 15%에 해당하는 금액을 추가로 감면해 줬다는 것이었다. 한국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파격적 대우에 감격했다”고 말했다.

7월 20일 정상회담을 위해 방한한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는 공항에서 내리자마자 영국 유통업체 테스코와 삼성이 합작해 설립한 할인점 홈플러스 서울 영등포점으로 직행, 점포를 둘러보았다. 국가 지도자가 앞장서서 기업을 존중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기업하기 좋은 환경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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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 ‘기(氣)’ 살리기=영국은 그것도 모자라 2001년부터 정부, 기업, 언론이 함께 ‘반기업 정서 퇴치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영국 정부는 90년대 심한 경기 침체를 겪으면서 미국에 비해 경제가 성장하지 못하는 이유, 기업이 활발하게 활동할 수 없는 원인 등을 분석했다. 그 결과 국민들에게 부(富)에 대한 부정적 인식, 기업에 대한 막연한 반감 등 문화적, 정서적 배경이 있다고 보고 정부 관료들과 기업 최고경영자(CEO)들이 함께 해결책을 모색했다.

7월 방한한 토니 블레어 영국총리(오른쪽에서 두번째)와 그의 부인이 삼성테스코 이승한 사장(왼쪽), 삼성전자 윤종용 부회장과 함께 홈플러스 서울 영등포점을 둘러보며 전자제품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다. -사진제공 삼성테스코

최근 영국은 학교 수업시간에 기업 현장체험 프로그램을 넣고, 교사들도 회사를 방문해 견학하는 행사를 활발히 하고 있다. 또 대기업 경영진이 직접 나서서 지역사회 중소기업과 친분을 도모하고, 지역대학 교수들에게 기업의 자문을 부탁하며, 기업 임직원들이 직접 각급 학교에서 기업가 정신을 강의하고 있다.

영국 정부와 함께 이 프로그램을 기획한 컨설팅업체 액센추어의 한국사무소 한봉훈(韓鳳勳) 사장은 “영국은 기업에 대한 친근감을 조성하기 위해 민관(民官) 합동으로 장기적이고 체계적인 계몽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고 전했다.

액센추어측은 중국 캐나다 러시아에서도 각국 정부와 함께 비슷한 프로그램을 추진하고 있다고 밝혔다.

▽기업, 기업인 다시 태어나야=기업과 기업인이 먼저 대오각성해야 한다는 의견이 많다. 정경유착, 분식회계, 탈법 상속 등은 한국 사회에서 기업인들이 지탄받는 대표적인 이유들이다.

참여연대 경제개혁센터 김상조(金尙祚·한성대 교수) 소장은 “한국인들이 갖고 있는 것은 반 기업 정서가 아니라 반 기업인 정서”라고 말했다. “한국의 대기업 총수들은 5% 안팎의 소수 지분을 가지고 마치 기업이 개인의 것인 양 전횡함으로써 주주, 근로자, 소비자 등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의 이익을 침해해 왔다”는 것이다.

김 소장은 또 “노조가 직접 경영에 참여하는 나라는 독일을 포함해 세계 어디에도 없다”면서 “그러나 근로자들에게 기업 경영에 대한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근로자들을 감시자이자 협력자로서 활동하게 해줘야 한다”고 지적했다.

가톨릭대 경제학과 곽만순(郭晩淳) 교수도 “검증받지 않은 경영권 세습과 신주인수권부사채(BW) 등을 이용한 편법 증여, 불법적인 부(富)의 상속 등이야말로 비정상적인 노조문화를 만든 하나의 배경”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기업인들이 정정당당히 세금을 내지 않거나 주주의 평가를 회피하니까 노조도 말이 안 되는 주장을 하면서도 부끄러워할 줄 모르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전문가들은 또 기업이 정계나 정부보다 변화가 빠른 집단이므로 정치권력이나 정부를 탓하기에 앞서 기업이 윤리경영, 투명경영, 올바른 기업지배구조 등을 실천함으로써 한국 사회의 변화를 선도해나가야 한다고 제안했다.

▽경영자를 ‘스타’로=사회 시스템을 정비해야 할 부분도 많다. 곽 교수는 “기업을 부도덕과 비윤리의 온상처럼 취급해서는 안 된다”면서 “생산적 기업과 부실한 기업, 건강한 기업인과 부도덕한 기업인을 구분하는 장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무엇보다 자본시장이 제대로 작동해 불량 기업을 제대로 솎아줘야 하며 외부 감사나 신용평가도 엄정해야 한다는 것.

세정(稅政)이나 사법적 접근, 금융감독 등이 투명하고 공평무사하게 집행돼야 하는 것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곽 교수는 “시민단체가 재벌의 편법 상속을 감시 고발하는 것은 과도기적 행태”라고 말했다.

대한상공회의소 박용성(朴容晟) 회장은 “반기업 정서를 해소하는 방법의 하나는 기업인들을 스타로 만드는 것”이라고 말했다. 누구나 본받으며 닮고 싶은 경영인상(像)을 설정할 필요가 있다는 것.

박 회장은 “전문경영인들이 대기업의 최고경영자로서 보람과 성취욕을 느끼고 수십억원대의 연봉을 받는데 바로 그런 사람이 스타 아니냐”고 말했다. 그는 이어 “엘리트들이 고시촌으로, 의과대학으로만 몰려가서는 한국의 장래가 어둡다”면서 “기업의 CEO를 인생의 목표로 삼는 젊은이들이 많아져야 한다”고 덧붙였다.

전국경제인연합회 손병두(孫炳斗) 고문은 캠페인이라도 벌이자고 제안했다.


‘기업사랑이 나라사랑’이라는.

신연수기자 ysshin@donga.com

이강운기자 kwoon90@donga.com

▼외국의 기업 대우 사례▼

1987년 한국 기업인 새한미디어가 아일랜드에 진출할 때의 일.

당시 새한 직원들은 현지에서 운전면허를 딸 때 외자유치 기관인 아일랜드산업개발청(IDA) 담당자가 면허시험장까지 따라와 도와주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얼마 후 한 번 더 놀랄 일이 생겼다. 직원들이 출퇴근할 때 불편해하자 IDA 담당자가 “출퇴근용 미니버스를 개조해서 좌석수를 늘리면 두 번 왕복할 필요가 없어 훨씬 편할 것”이라며 직접 차량 판매회사에 문의해서 개조 절차를 일일이 확인해준 것이다.

아일랜드의 공무원들이 기업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갖고 있는지 잘 보여주는 사례다.

80년대 후반까지 서유럽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로 꼽혔던 아일랜드는 최근 1인당 국민소득에서 영국을 앞질렀다. 10여년 만에 이렇게 급성장한 배경에는 정부의 공격적인 외자 유치 정책과 함께 기업을 소중하게 여기는 공무원들의 서비스정신이 깔려 있다.

삼성경제연구소 복득규 수석연구원은 “80년대 불황으로 큰 어려움을 겪으면서 기업 경영 활동을 제대로 지원하지 않고는 나라 전체가 살아남을 수 없다는 인식이 널리 퍼진 것이 고성장의 비결”이라고 지적했다.

보스턴컨설팅그룹 박상용 매니저는 “노사나 통상문제 등 기업과 관련된 정책을 집행하는 정부 조직이 한 곳에 통합돼 있어 정책 조율이 빠르고 효율적으로 이뤄진 것도 도움이 됐다”고 설명했다.

짧은 기간에 국가 경쟁력을 강화하는 비결은 ‘기업하기 좋은 환경’을 만드는 것뿐이다. 아일랜드를 비롯해 이른바 강소국(强小國)으로 꼽히는 국가들은 하나같이 투자 환경을 개선하고 규제를 개혁하며 기업가 정신을 높이려는 노력을 벌이고 있다. 국가와 기업이 건강한 협력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다.

네덜란드 기업 가운데에는 ‘로열 더치’로 시작하는 이름을 가진 곳이 많다. KLM 등 다국적기업에서 소규모 제빵업체에 이르기까지 250여개에 이른다. 국가 경제에 기여한 기업을 뽑아 이런 명칭을 사용할 수 있게 한다. 기업인들에게는 더 없는 영예다.

필립스 코리아 유재순 상무는 “네덜란드 국민은 왕실을 친구처럼 좋아하기 때문에 기업가들은 자신의 기업에 ‘로열’이라는 말이 붙으면 매우 영광스럽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런 정책은 기업가들이 자긍심을 갖게 해주는 역할을 한다.

유럽 최고의 외자 유치 실적을 자랑하는 스코틀랜드에는 ‘스코티시 엔터프라이즈’라는 독특한 기관이 있다. 국내기업과 외국기업을 가리지 않고 스코틀랜드 내에서 일어나는 갖가지 기업 활동을 지원하고 산업을 육성하기 위해 마련된 조직이다.

스코틀랜드투자개발청(SDI) 장헌상 한국 대표는 “스코티시 엔터프라이즈의 직원들은 신분은 공무원에 가깝지만 인사 정책은 민간기업과 비슷하다”며 “외자 유치를 포함해 기업 활동에 얼마나 도움을 줬는지 등의 실적을 평가해 고과에 반영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홍석민기자 smh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