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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농구 화제]한국인 최초로 美여자프로농구 진출 정선민

입력 | 2003-04-27 18:04:00

한국인 최초로 미국여자프로농구(WNBA)에 진출하는 정선민이 자신을 지명한 시애틀 스톰 유니폼을 입고 자신있게 엄지손가락을 세워보이고 있다. 이훈구기자


여자농구의 간판스타 정선민(29·신세계)이 한국 농구 사상 처음으로 미국 무대에 진출한다.

정선민은 26일 미국 뉴저지에서 열린 미국여자프로농구(WNBA) 신인 드래프트에서 1라운드 8순위로 시애틀 스톰의 지명을 받았다. WNBA 원년 시즌인 97년 신인 드래프트에서 각각 14순위와 16순위로 선발된 일본의 하기와라(전 새크라멘토), 중국의 쳉하이샤(전 LA)에 이어 아시아 선수로는 3번째다.

기자가 경남 마산 집에 있던 정선민에게 전화를 건 것은 신인 드래프트 시작을 3시간여 앞둔 25일 밤. 운명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는데도 휴대전화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는 의외로 차분했다.

“이제 제 손을 떠난 일이잖아요. 하늘에 맡기고 기다리려고요.” 침착한 목소리는 그만큼 미국 진출에 대한 확신이 있다는 뜻이었을까.

“좋은 소식 기다릴게요”라며 전화를 끊은 뒤 15시간이 흘러 26일 오후 서울 워커힐호텔. 짧은 스커트 차림에 곱게 화장을 한 정선민을 만났다. ‘계절의 여왕’이라는 5월을 눈앞에 둔 호텔 정원에는 ‘코트의 여왕’ 정선민의 WNBA 입성을 축하라도 하는 듯 시원한 강바람 속에 온갖 꽃들이 만발해 있었다.

한국 농구 사상 첫 WNBA 선수 정선민. 그에게 이번 미국 진출은 농구 인생을 건 마지막 승부수였다. “얼마 전 끝난 TV드라마 ‘올인’ 있잖아요. 제가 바로 그랬다니까요. 올해 실패하면 더 이상 기회가 없을 것 같아 제 모든 것을 털어 넣었어요.”

정선민은 한국여자농구연맹(WKBL) 겨울리그가 끝난 3월7일 서울 청운동 신세계 숙소에서 짐을 모두 싸가지고 고향 마산으로 내려갔다. WNBA 진출에 목숨을 걸겠다는 일념만을 간직한 채 더 이상 국내 소속팀에 대한 미련을 없애려고 양말 한 켤레도 남겨두지 않았다.

비장한 각오로 낙향한 정선민은 두 달 가까이 외로운 개인 훈련에 매달렸다. 오전에는 덩치 큰 미국 선수들을 떠올리며 강도 높은 웨이트트레이닝으로 체력을 길렀고 오후에는 마산동중에서 남자 중학생들 사이에 끼어 공을 던졌다. 센터를 보던 한국에서와 달리 미국에 가면 포워드로 나서야 했기에 외곽 슈팅 능력을 기르는 데 집중했다.

하지만 주위에서 들려오는 소식은 그리 밝지 않았다. WNBA 사무국과 선수협의회의 갈등으로 트라이아웃 캠프가 무산된 데 이어 드래프트 날짜가 차일피일 미뤄졌고 아예 시즌 개막이 불투명하다는 불안한 뉴스가 전해진 것. “안 좋은 소식만 쏟아질 때는 정말 속이 상했어요. 이러다 미국 진출이고 뭐고 다 끝나는 게 아닌 가 했죠.”

깊은 터널 속에 갇혀 있는 듯한 느낌이 들 때마다 정선민은 혼자 무학산에 올랐다. 정상에서 탁 트인 마산 시내를 내려다보면 새로운 힘이 났다. 힘들었지만 주위에는 내색도 하지 않았다. “이겨내야 한다고 몇 번씩 다짐했어요. 일부러 친구나 선후배에게 전화도 안했어요.”

그랬다. 온갖 어려움 속에서도 오뚝이처럼 일어났던 정선민이 아니던가. 실업 SK증권에서 뛰던 98년 농구대잔치에서 우승한 뒤 어이없게 팀이 해체되는 아픔을 겪었지만 신세계에서 제2의 전성기를 맞았다.

99년 5월에는 아시아선수권대회에서 왼쪽 무릎 뼈를 다쳐 일본에서 수술을 받느라 1년여의 공백이 있었다. 당시 정선민은 무릎에서 떼어낸 뼈 조각을 병에 담아 숙소 머리맡에 놓고 투지를 불사른 끝에 재기에 성공했다.

미국 진출 과정 역시 우여곡절이 많았다. 2000년 시드니올림픽 4강을 계기로 이듬해 WNBA로부터 드래프트 캠프 공식 초청장까지 받았으나 소속팀 신세계의 사정으로 참가를 포기했고 지난해에는 다시 무릎 부상이 도져 꿈을 접어야 했다. 정선민은 “삼세번이라는 게 있잖아요. 제가 바로 3수 끝에 성공한 셈이지요”라며 미소를 지었다.

아무리 강단있는 정선민이라지만 새로운 세계에 대한 두려움은 없을까. “주위에서 제가 잘 할 수 있을까 반신반의하는 분위기라는 거 잘 알고 있어요. 그래서 더 편해요. 부담 없이 제가 갖고 있는 기량만 펼치면 되니까요.”

그래도 WNBA 진출 1호의 자존심은 잊지 않고 있었다. “우리 선수들도 얼마든지 해외에 나가서 잘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싶어요. ‘역시 정선민’이라는 얘기를 들어야죠. 제가 잘 해야 앞으로 후배들이 도전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겠어요.”

정선민도 내년이면 만으로 30세가 된다. 운동선수를 떠나 여자로서의 장래도 한번 생각해 볼 나이. “결혼 말씀하시는 거죠? 미국에 다녀온 뒤 생각할래요. 사귀는 사람은 있지만 진지하게 앞날을 얘기해 본 적은 없어요.”

농구를 너무 잘 아는 세살 위의 항공사 승무원과 편하게 만나고 있다는 정선민은 “시애틀에는 비가 많이 와 우울증 환자가 많대요. 사실 저도 외로움을 탈까봐 걱정이에요. 짐 쌀 때 노트북PC는 꼭 가져갈 거예요. e메일 주고받고 한국 팬들과 대화도 할 수 있으니까요”라며 속내를 털어놓았다.

93년 마산여고를 졸업한 정선민에게 올해는 성인 농구 데뷔 10년이 되는 해. 강산이 한번 변하는 세월 속에 마침내 한국 농구에서 누구도 이루지 못한 WNBA 진출의 꿈을 성취한 정선민은 부푼 기대와 설렘으로 가득 차 있었다. 정선민은 29일 또는 30일 출국해 트레이닝 캠프에 참가한 뒤 다음달 23일 개막되는 WNBA 2003 정규리그에 동양인 선수로는 유일하게 출전한다.

김종석기자 kjs0123@donga.com

●정선민은 누구인가

△생년월일〓74년 10월12일

△신장〓1m85, 76㎏

△가족관계〓정명윤씨(57)와 고미경씨(54)의 1남 1녀 중 장녀. 남동생은 상무 남자농구팀 정훈종(2m5)

△경력=마산산호초-마산여중-마산여고-SKC-신세계

△좌우명=내 운명은 스스로 개척한다

△별명〓백마

△혈액형〓B형

△종교=천주교

△e메일〓coolcatmean@hotmail.com

△주량=소주 1병, 맥주 2병

△최근 즐겨듣는 노래〓그랬나봐(김형중)

△수상경력=93-94농구대잔치 신인상, 95-96농구대잔치 MVP, 99WKBL 겨울리그 MVP, 2000WKBL 여름리그 MVP, 2001WKBL 여름리그 MVP, 2002WKBL 겨울리그 MVP

김종석기자 kjs0123@donga.com

▼“한국여자농구의 펠레 신체조건-파워 뛰어나”…앤 도노반 감독이 본 정선민

시애틀 스톰 앤 도노반 감독(43·사진)은 신인 드래프트 직후 자신이 뽑은 정선민에 대해 높은 기대감을 표시했다.

지난해 부임한 도노반 감독은 26일 시애틀 타임즈와의 인터뷰에서 “정선민은 한국에서 여자 농구의 펠레”라며 “지난해 세계선수권대회를 비롯해 여러 국제대회에서 정선민의 활약을 지켜봤다. 휴스턴에서 우리 보다 앞서 그를 지명할 까봐 걱정했다”고 말했다.

그는 “정선민을 면밀하게 검토한 결과 몸놀림이 빠르고 신체조건과 파워가 뛰어나다는 결론을 얻었다”고 1순위 지명 이유를 밝혔다. 또 “앞으로 파워포워드 또는 스몰포워드로 기용할 생각이다. 한국과 미국의 농구 스타일이 다르긴 해도 잘 적응할 것으로 본다”고 정선민의 가능성을 인정했다.

농구 명예의 전당 회원인 스타 출신 도노반 감독은 84년 LA올림픽에서 미국 국가대표 주전 센터로 당시 결승에서 한국을 꺾고 금메달을 따내는 주역을 맡았다. 80년대 후반 3년 동안 일본여자농구 샹송화장품에서 용병으로 뛴 적도 있다.

김종석기자 kjs0123@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