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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횡설수설]송문홍/국회 담 넘은 여배우

입력 | 2003-02-05 18:14:00


미국의 수도 워싱턴DC를 방문하는 관광객이 한번은 꼭 들르는 명소 국회의사당은 캐피털 힐(Capitol Hill) 위에 멋진 자태로 서 있다. 개방적인 미국사회를 상징하듯 의사당 건물을 주변과 격리하는 담장이 없는 것은 물론이다. 9·11 테러 이후 경비가 강화됐다고 하지만 관광객들은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낮 시간 동안에 국회의사당 내부를 구석구석 둘러볼 수 있다. 방문객은 이런 경험을 통해 220여년 역사를 거치면서 탄탄하게 뿌리내린 미국 민주주의의 전통과 권위를 새삼 느끼게 된다.

▷반면 우리의 여의도 국회의사당은 높고 긴 담장으로 둘러싸여 있다. 방문객은 우선 국회 출입구마다 지키고 서 있는 경비원에게 주눅부터 들어야 한다. 회의장 등 국회시설을 단체로 참관하는 것 외에 관광객을 위한 프로그램도 이렇다 할 만한 게 없다. 명색이 국민의 대의(代議)기관이라면서 국민에게 고압적인 ‘관행’은 곳곳에 널려 있다. 국회의원은 경비원의 경례를 받으며 정문으로 드나들지만 막상 이들을 선출한 방문객은 건물 뒤편으로 수백m를 돌아 면회실로 통하는 뒷문을 이용해야만 한다. 유권자들을 이렇게 푸대접하는 국회가 대한민국 말고 어디 또 있는지 궁금하다.

▷미니스커트 차림의 여배우가 2m 높이의 국회 정문을 넘는 사진이 신문에 실려 눈길을 끌었다. 몇 달 전부터 국회측에 촬영을 요청했으나 끝내 거부당한 영화 제작팀이 마지막 수단으로 ‘사고’를 쳤다는 것이다. 영화에서 윤락녀 출신 국회의원 당선자로 나오는 이 여배우는 정문을 넘어간 후 몇 발짝 떼어보지도 못하고 끌려 나왔다고 하던가. 국회로서는 여배우의 행동이 자신의 권위에 대한 ‘발칙한 도전’으로 보였겠지만, 이 해프닝을 지켜본 국민의 생각은 어땠을까.

▷권위란 자신이 주장한다고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남들이 인정할 수밖에 없을 만큼 올바르게 행동할 때 자연스럽게 형성되는 법이다. 영화촬영을 물리적으로 저지한 국회측의 처사는 그렇게 높이고 싶어하는 권위를 오히려 허물어 내리는 행동이다. 그들은 윤락녀가 영화에서라도 국회의원이 될 수 없을 만큼 지체가 높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우리 국민은 시시때때로 행정부의 시녀노릇이나 하던 국회의 위상을 잘 기억하고 있다. 윤락녀와 시녀의 차이가 무엇인지 모르지만. 차라리 국회가 촬영에 기꺼이 협조해 주었다면 어땠을까. 우리도 영화에서나마 ‘한국판 치치올리나’(이탈리아의 포르노배우 출신 국회의원)를 수용할 만큼 성숙했다는 그 대범함이 오히려 국회의 권위를 높이는 작용을 하지 않았을까.

송문홍 논설위원 songmh@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