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트렌드 생활정보 International edition 매체

[인문사회]思惟의 소용돌이를 만났다 '노마디즘'

입력 | 2002-12-06 18:05:00


◇ 노마디즘(1, 2)/이진경 지음/1권 784쪽, 2권 766쪽, 각권 2만8000원, 휴머니스트

프랑스 철학자 들뢰즈는 ‘노마드 사상’이라는 글에서 유목민들의 탈영토화 운동을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작은 배’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신민으로서 거주했던 낡은 영토에서 벗어나 유목민이 되는 순간, 딱딱하게 굳어 있던 육지가 요동치는 바다로 바뀌기 때문일 겁니다. 흰 고래와 함께 폭풍 속으로 사라진 ‘백경’의 에이허브 선장처럼 탈주자들에겐 항상 고유의 위험이 따르기 마련이지요. 배를 탄 사람들은 물의 리듬을 잘 타야 합니다. 리듬을 놓치면 배는 순식간에 요동치는 물살 속으로 휩쓸리니까요.

이 책을 읽으면서도 마찬가지 생각을 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리듬을 타는 것이다.’ 저자는 독서를 수영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수영을 한다는 것은 물의 리듬을 타는 것이고 거기에 자신의 리듬을 일치시키는 것입니다.” 이론적으로만 ‘빠삭’한 것은 실제 수영에 큰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리듬을 탄다는 것은 무언가를 실제로 행할 수 있는 능력과 관계 있습니다.” 물의 흐름을 타면서 때로는 그것을 이용하고 때로는 거기에 변용을 가했을 때 우리는 비로소 그 속도의 주인이 될 수 있다는 겁니다. 유목민들이 달리는 말 위에서 기막힌 마장술을 펼칠 수 있는 것도 그 속도의 주인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겠지요.

그런데 이 책에서 물 위를 미끄러져 가는 건 배가 아니라 태풍인 듯합니다. 책은 외부를 계속 구부려 놓는 거대한 소용돌이를 닮았습니다. 들뢰즈와 가타리가 그랬듯이 저자는 열거하기 불가능할 정도의 인물과 사건들을 빨아들입니다. 그는 들뢰즈와 가타리가 ‘천의 고원’에서 가로질렀던 철학, 문학, 영화, 미술, 음악, 과학의 영토를 휘저어 갑니다만, 그들의 여정을 그대로 반복하는 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노마디즘’을 통해 조주와 혜능의 어록, 김삿갓의 시, 김대례와 조공례의 소리, 윤이상과 한영애의 음악 등도 만날 수 있습니다.

소용돌이는 점차 커집니다. 하지만 소용돌이의 확장은 외부를 정복해 가는 과정이 아니라 오히려 외부를 통해 내부를 정복해 가는 과정입니다. 외부에 자기 논리를 강요하는 게 아니라 외부를 끌어들여 자기 자신을 변화시키는 것이지요. 이때문에 우리는 ‘천의 고원’이나 ‘노마디즘’에 나오는 수많은 이름과 사건들을 내부 논리를 확증해 주는 사례들로서가 아닌, 새로운 사유의 구성요소들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하나의 논리를 전체에 적용시킴으로 전체에 대한 논리를 발견했다고 믿는 철학자들의 태도와는 대조적이지요).

법칙과 질서를 강조하는 ‘왕립과학자’들은 이런 소용돌이를 아주 불편해 합니다. 하지만 유목적 과학자들에게는 ‘투르보(turbo)’, 즉 소용돌이가 중요합니다. 그들은 초월적인 존재나 고정된 본질이 있다는 이야기를 믿지 않습니다. 본질이란 외부와의 관계에 따라, 접속한 이웃과의 관계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한 곳에 뿌리를 단단히 박은 수목보다는 사방에 접속의 고리를 열어두는 잔디뿌리(리좀)가 중요하고, 특정 기능으로 기관화된 신체보다는 그 어떤 것으로도 변이될 수 있는 ‘기관없는 신체’가 중요한 것이지요.

분명 소용돌이는 위험한 것일 수 있습니다. 왕립과학자들처럼 우리도 휘몰아치는 태풍을 걱정합니다. 하지만 감당할 수 없는 가속도는 태풍의 가장자리뿐입니다. 태풍의 중심은 고요한 방이니까요. 리듬을 타고 들어가 속도의 주인이 되는 순간, 우리는 외부에서 끌어들인 생명력으로 끊임없이 변신하면서도 가장 고요한 지대에 들어앉을 수 있습니다. ‘침묵으로 노래하고 싶다’는 한영애의 바람처럼 태풍의 눈은 모든 노래가 가능한 고요의 영역입니다. 잃을 건 없습니다. 단지 ‘나’ 하나를 버리면 그만입니다. 그래서 저자는 ‘천의 고원’에 없는 하나의 장을 추가합니다. ‘무아(無我)의 코뮨주의’. 저는 그 마지막 장이 태풍의 중심에 있는 빈방처럼 느껴집니다. 나를 비움으로써 얻은 무한한 세계로 충만한 그 방 말입니다.

‘노마디즘’은 ‘천의 고원’ 속으로 들어가 커진 소용돌이입니다. 저자는 자신이 들뢰즈와 가타리를 통해 이 소용돌이에 휘말렸다(in-volution)고합니다. 하지만 그는 끌려 들어갔다기보다는 태풍이 되기 위해 태풍 속으로 뛰어든 것처럼 보입니다. 만약 책을 읽다가 몸이 떨리는 걸 느꼈다면 당신도 곧 결정해야 할 겁니다.

고 병 권 고려대 노동문제연구소 연구원·사회학

unzeit@hanmir.com

트랜드뉴스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