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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고학 외길 조유전 국립문화재연구소장 "인생을 발굴했어요"

입력 | 2002-05-09 18:41:00


《충남 공주의 무령왕릉 발굴, 경북 경주의 천마총 황남대총 안압지 감은사지 황룡사지 발굴…. 한국 고고학사에 길이 남는 발굴들이다. 이 발굴에 참여하면서 30년 넘게 전국 곳곳의 발굴 현장을 누벼온 조유전 국립문화재연구소장(60)이 다음달 정년 퇴임한다. 서울대 고고인류학과(현 고고미술사학과) 2회 졸업생인 그는 졸업 직후인 1969년 문화재관리국(현 문화재청)에 발을 들여놓은 뒤, 한눈 한 번 팔지 않고 우직하게 30여년 고고학 외길을 걸어왔다. 지건길 국립중앙박물관장, 이종철 국립민속박물관장이 그의 동기다. 》

7일 서울 경복궁 내 문화재연구소에서 그를 만났다.

“제가 1962년 대학에 입학했으니까 그 때부터 치면 고고학자로서 40년 인생입니다. 40년 동안 고고학자가 발굴 현장에서 살아왔으니 그보다 더 행복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중간에 국립민속박물관장 4년 한 것이 외도라면 외도지만, 저로서는 과분한 삶을 살았습니다.”

퇴임을 얼마 앞둔 그의 소감은 비교적 담담했다. 정년 퇴임이라고 해서 발굴 현장을 떠나는 것은 아닐테니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발굴을 묻자, 자괴감 때문인지 그의 얼굴 색이 변한다.

“물론 1971년 공주 무령왕릉 발굴이죠. 한두해 걸릴 법한 발굴을 하룻밤 졸속 발굴로 끝내버렸으니, 원…. 그렇게 중요한 발굴을 해본 적이 없는 당시로선 한국 고고학의 어쩔 수 없는 한계이기도 했지만 어쨌든 고고학자로서 평생 지울 수 없는 큰 죄를 지었습니다.”

대신, 1982년 경주 대왕암 앞바다에서 대종(大鐘)을 발굴하던 얘기를 할 때는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대왕암 앞바다에서 대종 찾는다고 쇼를 벌인 거였죠. 그해 여름, 대왕암 근처에 사는 한 촌로가 ‘감은사 종을 왜구가 약탈해가다가 바다에 빠뜨렸고 그래서 지금도 날씨가 흐리면 바다 속에서 댕댕 종이 울리는 소리가 들린다’면서 경주박물관에 제보를 했습니다. 그래서 그해 가을 한달간 동해 바다의 파도와 싸웠는데, 종은 무슨 종입니까. 소문에 놀아난 거죠. 허, 참.”

그는 문화재청 문화재연구소 학예직으로 30여년 근무한 덕분에 전국의 주요 발굴에 참여할 수 있었다. 고고학자가 발굴 현장을 떠나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는 보기 드물게 행복한 고고학자다. 그래서인지 “저만 이렇게 행복한 고고학자의 길을 걸어 후배들에게 미안할 따름”이라는 말을 빠뜨리지 않았다.

그는 문화재연구소장 시절인 1999년부터 러시아 아무르강 하류 수추섬의 신석기 유적을 현지 기관들과 공동 발굴해오면서 한국 고고학의 위상을 한껏 높이는데도 기여했다. 또한 문화재 보존 과학에도 신경을 써 천연약재에서 추출한 향기로 문화재를 보존하는 방충방균제를 세계 최초로 개발하기도 했다.

퇴임을 앞둔 그는 한국 고고학계 50여년의 숙원사업이었던 ‘한국고고고학사전’을 발간해 후배들에게 큰 선물로 남겼다. 1946년 5월 한국인에 의한 최초의 발굴이었던 경주 호우총 발굴 이후 꼭 56년만의 일이다.

“한국고고학사전 발간은 고고학자로서 저의 평생 소원이었습니다. 이제 그 소원을 풀고 나니 큰 짐을 벗은 것처럼 마음이 홀가분합니다.”

영원한 고고학자로 남겠다는 그에게 고고학의 매력이 무엇인지 물었다.

“땅을 파내려가는 힘겨운 노동 끝에 땅 속에서 유물이 발견되는 순간, 그리고 그것을 통해 감춰진 역사가 밝혀질 때의 희열은 발굴을 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겁니다. 고고학자는 금관만 캐러 다니는 사람이 아닙니다. 번쩍이는 금관이나 작은 토기 파편이나 모두 똑같이 소중합니다. 그것이 고고학입니다. 고고학은 엄격한 학문입니다. 만일 금관이나 돈 나가는 것만 중요하게 보고 토기 파편을 시시하게 여긴다면 그것은 골동상이지 고고학자가 아닙니다.”

이광표기자 kpl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