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 나라도 아니야.” 며칠 전 환경운동의 대부로 시민운동의 야전사령관역을 해온 한 선배는 최근의 사태에 대해 이렇게 말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다. 온 국민이 경제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피눈물을 흘리고 있을 동안 대통령의 세 아들들이 연루된 것으로 의혹을 받아온 것들 중 상당부분이 서서히 진실로 나타나고 있고, 청와대의 비서관들이 줄줄이 이 의혹들과 다른 여러 문제들에 연루된 의혹을 받고 있다. 그런가 하면 ‘청와대 총경’으로 불리던 경찰의 핵심 관계자가 007작전을 방불케 하는 해외도피 작전을 펴고 있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 엽기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이런 나라도 나라일 수 있는가’하는 의구심을 버릴 수 없다.
그러나 이번 엽기드라마의 압권은 뭐니뭐니 해도 역시 최성규 전 총경의 해외도피다. 놓치는 것인지 놓아주는 것인지 사건만 터지면 핵심 관계자들이 한발 앞서 해외로 도주해온 최근의 추세를 보면 최 전 총경이 해외로 도주한 것은 놀랄 일도 아니고 오히려 예상했던 일이다.
▼입국허가 특별배려한 까닭은▼
그러나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어떻게 해서 최 전 총경이 미국의 입국 허가를 받은 후 대기 중이던 한국 정부의 관계자들과 기자들을 따돌리고 특별출구를 통해 유유히 뉴욕공항에서 사라질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 야당과 언론에서는 7대 미스터리라는 식으로 의문점들을 제기하고 있다.
물론 조사결과 나타나고 있듯이 한미범죄인인도협정이 범죄의 예방에 적용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외교통상부가 최 전 총경이 협정의 적용대상이 아니라는 식으로 소극적으로 대응해 현지에 파견 중인 경찰관계자가 비공식적인 억류 요청을 함으로써 미국의 적극적인 조치를 받아내지 못한 측면이 크다. 그러나 9·11 테러 이후 미국은 출입국 심사를 대폭 강화해 체류허가 기간을 대부분 한 달로 제한하는 등 ‘요새국가’로 나아가는 추세를 보여 왔다는 점에서, 비공식적이기는 하지만 한국정부가 억류 협조요청까지 한 사람에게 6개월 체류허가를 해주고 특별통로로 내 보낸 것은 고개를 갸우뚱하게 한다.
사실 최 전 총경의 미국 잠적 소식을 듣는 순간,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얼마 전 인터넷에 올라 폭발적 인기를 끌었던 ‘엽기 김대중’이라는 MP3 파일이었다. 즉, 미국의 F15K 전투기 구매 압력에 대해 김대중 대통령이 미국 조지 W 부시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어 특유의 전라도 사투리로 속 시원하게 시비를 거는 가상현실 이야기다. 주지하다시피 F15K 전투기는 성능과 부품 조달 등 여러 면에서 문제가 많은 것으로 알려져 공군의 관계자가 문제점을 폭로하고 시민단체들이 구매반대 운동을 펼쳐온 적이 있어 우리 국민은 이 가상 육성을 통해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느끼기도 했다.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보고 놀란다고, 각종 공작과 음모론에 익숙해 있는 탓인지 최 전 총경의 소식을 듣는 순간 그의 도주를 원하는 권력의 핵심 관계자가 미국 정부에 최 전 총경에 대한 특별배려를 요청했고, 김대중 정부의 F15K 전투기 구매 결정에 대한 보답의 차원에서 미국이 이에 응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을 갖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따라서 미국은 이에 대한 정확한 진상을 해명할 필요가 있다. 이와 관련, 미국은 최근 일반 국민 사이에 심상치 않게 퍼져 가고 있는 반미감정, 좋게 이야기해 혐미(嫌美) 감정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같은 분위기는 1997년 말 경제위기에서 시작됐다. 경제위기와 함께 미국이 한국에 가혹한 구조조정을 요구하고 그 과정에서 우리 기업들을 헐값에 사들이고 있다고 생각하는 국민이 늘어나면서 이 같은 분위기가 형성되기 시작했고, 부시 대통령의 고압적인 세계전략과 한반도정책이 이를 가속화시켰다.
▼침묵땐 反美감정 촉발할 수도▼
특히 ‘악의 축’ 발언과 F15K 전투기 구입 압력이 중요한 촉매가 됐다. 설상가상으로 솔트레이크시티 동계올림픽의 ‘오노 파동’이 다시 한번 이 같은 분위기에 휘발유를 붓고 말았다. 그리고 이번 최 전 총경 도피 사건 역시 또 다른 촉매 구실을 할 가능성이 적지 않다.
물론 미국은 이 문제에 대해 출입국 관리는 미국 정부의 고유한 권한이며 이에 대해 미국이 누구에게 설명이나 해명을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최근 한국민 사이에 심상치 않게 퍼져 가고 있는 반미 분위기를 고려할 때, 미국은 최 전 총경 도피 사건에 대한 자국의 입장을 한국민에게 설명함으로써 불필요한 오해를 불식할 필요가 있다.
손호철 서강대 교수·정치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