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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족들의 회한]"12·12고통 아직 끝나지 않아"

입력 | 2001-12-11 18:13:00


“총칼로 정권을 빼앗은 신군부에 저항하다 목숨을 잃은 군인 피해자들의 고통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12·12 군사반란 22주년을 하루 앞둔 11일 오전 서울 동작구 동작동 국립묘지. 반란군의 총탄에 숨진 김오랑(金五郞·당시 35세) 중령과 정선엽(鄭善燁·당시 25세) 병장의 묘소를 찾은 유족들은 착잡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육사 25기 출신으로 당시 정병주(鄭柄宙) 특전사령관의 비서실장이었던 김 중령(당시 소령)은 반란 다음날인 13일 오전 자신의 상관을 체포하기 위해 들이닥친 반란군을 저지하다 총격을 받고 숨졌다.

김 중령의 장조카 김영진(金榮鎭·45·경남 김해시)씨는 “그날의 충격이 지금도 생생하다”며 “삼촌의 죽음 이후 온 집안이 풍비박산했다”며 말을 잇지 못했다.

81년에는 비명에 간 막내아들의 이름을 애타게 부르던 김 중령의 어머니가 눈도 감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고 82년에는 조카를 잃은 슬픔을 견디지 못한 삼촌마저 저 세상으로 갔다.

불행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91년에는 충격 때문에 실명한 김 중령의 부인도 자신의 아파트에서 떨어져 숨졌다.

김영진씨는 “숨진 삼촌이 90년에 중령으로 추서됐지만 이는 최소한의 명예회복일 뿐입니다. 그동안 가족들이 겪은 엄청난 고통을 누가 보상해 주겠습니까”라며 울먹였다.

정 병장의 가족들은 기독교에 귀의해 고통을 이겨내려고 애써왔다. 군사반란 당시 국방부 헌병대 소속이던 정 병장은 국방부 청사 후문에서 반란군을 저지하다 이들이 쏜 총에 맞아 숨졌다. 조선대 2학년 재학 중 입대한 그는 제대를 3개월 남겨둔 상태였다.

아들을 잃은 충격 때문에 어머니 한점순씨(78)는 지금도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으며 그리움을 잊기 위해 아들의 사진을 모두 없애야 했다.

정 병장의 형 훈채(勳采·50·서울 관악구 신림동)씨는 해외 선교사가 되기 위해 2년 전 다니던 은행을 그만두고 현재 신학교에 다니고 있다. 그는 “동생이 죽기 얼마 전에 전화로 ‘제대한 뒤 미국으로 유학가고 싶다’고 한 말이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며 동생의 비석을 어루만졌다.

주동자들은 내란 음모 혐의로 처벌받았지만 유족들은 12·12 군사반란은 아직도 ‘진행형’이라고 말했다. 5·18 민주화운동은 특별법이 제정돼 피해자들에 대한 보상까지 이뤄졌지만 군사반란 당시 신군부에 맞서다 숨진 군인 피해자들은 역사에 단 한 줄도 기록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

유족들은 “상관의 명령에 묵묵히 따르다 역사 속으로 사라져간 군인 피해자들에 대한 명예회복과 배상이 이뤄져야 사건이 제대로 마무리될 수 있을 것”이라며 묘역을 나섰다.

ysh1005@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