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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에서]박영균/위원회 공화국

입력 | 2001-12-09 18:04:00


공적자금의 관리를 맡은 예금보험공사 사장이 최근 제출한 사표가 부실한 공적자금 때문에 허탈한 국민에게 다소나마 위안이 됐으면 좋겠다.

사표를 낸 일이 잘했다는 것이 아니라 언제부터인가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고 물러나는 공직자들을 거의 본 적이 없는 탓이다. 책임지기는커녕 억지를 부리거나 나중에 어떻게 되든 간에 소송을 걸고 보는 사례가 다반사였다. 특히 권력자 주변의 인물이나 권력기관의 공직자들에게서 그런 경우가 많았다.

공직자들뿐만이 아니다. 외환위기 이후 부실경영으로 금융기관이 쓰러져 공적자금이 수천, 수백억원이 들어가고 수만명의 금융인들이 일자리를 잃었지만 책임지겠다며 사과하는 금융기관장은 별로 없었다. 이른바 각종 ‘빽’을 동원해 빠져나가는 사람도 적지 않다고 한다.

그래서 부도난 일본 금융기관장들이 허리까지 숙여 국민에게 사과를 하는 텔레비전 속의 장면을 보고 부러워했던 적도 있다.

얼마 전 외국자본이 인수한 제일은행의 행장이 갑자기 바뀐 적이 있다. 외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은행장을 맡아 1년9개월 만에 물러난 윌프레드 호리에 행장은 “행장 사임은 스스로 결정한 것”이라고 말했다. 게다가 그는 200억원 정도의 이익을 얻을 수 있는 스톡옵션도 포기했다. 은행측이 구체적으로 사임 이유를 밝히지 않았지만 뭔가 실적이 만족스럽지 않았거나 대주주측과 의견차이가 있었던 게 아닌가 싶다. 아무튼 그는 책임을 지고 물러났다.

우리의 현실을 보자. 요즘 공직자 사회에선 솔선해서 책임을 지기는 고사하고 우선 책임을 피하고 보자는 편법이 판을 치고 있다.

가장 손쉬운 방법으로 지시는 하되 흔적은 절대 남기지 않는다. 권력기관이나 감독기관이 담당자를 조용히 불러 말로 협조를 부탁하는 식이다. 문서는 절대 안되고 전화도 사절이다. 나중에 오리발을 내밀기도 쉽거니와 법원에서조차 증거로 채택되기 힘들기 때문이다.

최근 하이닉스와 마이크론과의 합병협상이 이런 의심을 받고 있다. 정부와 국책은행이 중요 결정을 다 해놓고 은행이나 회사측은 실무적인 작업만 한다는 소문이다. 나중에 문제가 되더라도 정부나 국책은행은 책임이 없다. 이런 것을 두고 창구지도라거나 업무협조라고 부르는 모양이다.

요즘 자주 등장하는 방식은 집단주의적 의사결정방법이다. 위원회나 협의회를 만들고 내부 토론과 결정과정은 철저히 비밀에 부친다. 가끔 위원회에 참석한 사람들이 ‘우린 들러리냐’면서 항의하거나 퇴장하는 일만 없도록 하면 된다.

예컨대 공적자금관리위원회나 하이닉스반도체구조조정특별위원회가 대표적인 사례다. 공적자금을 관리하는 예금보험공사가 있는데도 별도 위원회를 뒤늦게 만든 것도 적절치 않거니와 하이닉스 채권단이 해야 할 일을 전직 관료출신을 위원장으로 한 특별위원회에 맡긴 일도 석연치 않다. 결정은 위원회가 하지만 어디까지나 자문기관일 뿐이다. 법적인 책임은 거의 없다. 위원회는 여러 이해집단의 주장이나 전문가들의 의견을 듣고자 할 때 거치는 기구이다. 함부로 정체 모를 위원회를 만드는 것은 책임회피나 다름없다.

앞으로는 스스로 책임질 것을 각오하고 소신 있게 결정하는 공직자들을 보고 싶다. 그런 공직자에게 박수를 보내자.

박영균parky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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