뫼비우스의 띠를 따라 가보면 안에서 시작했지만 밖에서 만나고, 밖이라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안이다. 이것이 아니라면 저것이어야 하고 저것이 아니라면 이것일 수밖에 없는 세계에서는 진실을 말하기 어렵다. 안과 밖이 뒤집히지도 않고 하나가 되고 저것이지만 곧 이것이 되는 세계는 원형적 실재이며 영원한 시작의 세계이다.
시는 이것과 저것을 뚜렷이 구별짓는 사고로부터 부단한 탈출을 시도한다. 이미지로 전달하는 시는 이것 혹은 저것만을 말하지 않는다. 이것과 동시에 저것을 말하며 이것이 곧 저것이라고 말한다.
중견시인인 이경림씨의 ‘나만이 아는 정원이 있다’는 소설이 아니다. 시도 아니다. 그러나 시이며 소설이다. 딱딱한 껍질을 벗고 싶어하는 그의 체질이 ‘안’으로부터 시작해 ‘밖’이 되는 뫼비우스의 띠 돌기를 선택한 듯하다. ‘안’이라는 글에서 그는 이런 식으로 말한다.
“그 문은 아주 크고 검고 딱딱했다. 나는 가까스로 그 폐가(廢家)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 안은 풀 한 포기 자라지 않았다. 털벌레 한 마리 없었다. 나는 어떤 바닥 같은 오래된 것 위에 앉아 햇빛이 가늘고 긴 꼬챙이를 가지고 그것들을 헤집고 다니는 것을 바라보았다. 문득 내 눈 아래 무언가 반짝거렸다. 그것은 누군가 쓰다버린 거울이었다. 그것은 먼지 사이에 뻥 뚫린 길이었다. 그것은 얼음처럼 빛났다. 나는 그것을 집어 올렸다. 내 손바닥에 깊고 깊은 구멍이 뚫렸다. 나는 그 길로 들어갔다. 하늘은 높고 태양은 진자줏빛이었다.”
쓰다버린 거울을 통해 빛은 손바닥에 깊은 구멍을 뚫고 우리를 그 구멍 속으로 끌고 들어간다. 번개처럼 스쳐 가는 아름다운 순간이다. 비현실적인 공간에서 일어난 일 같다. 그러나 실제로 발견되는 현상이기도 하다. 비현실 같은 현실 또는 현실같은 비현실은 우리를 저 너머 다른 세계 다른 진실로 데려다 준다. 그것에 이경림은 ‘안’이라고 이름 붙여 준다.
이 책에 나오는 주인공들은 오렌지 한쪽이고 쓰다버린 거울 쪼가리이며 늙은이의 말없는 보퉁이 들이다. 또는 ‘셈치고’ ‘예컨대’처럼 허사같이 쓰이는 단어가 주인공이 되기도 한다. 그것들은 이름 붙일 수도 없는 세계 속에서 없는 듯이 숨어 있던 존재들이다. 그것이 빛을 발하고 의미를 획득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쳐다봐 주는 시인의 눈을 필요로 한다.
이경림은 없는 여자에게도 이름을 붙인다. 거기서 없는 돈으로 없는 집을 얻어 없는 시애비와 없는 시동생들을 부양하며 매일 나가기만 하는 없는 남편과 없는 사랑으로 애나 만들고 없는 시에미가 궁시렁거리는 속에서 없는 듯이 사는 여자에게 ‘없는, 그녀’라는 제목을 붙인다. 그 중의적 역설적 말재미와 함께 전달하고 있는 짧은 이야기의 뒷맛은 쓰디쓰다. 그것은 비현실이면서도 현실 그 이상으로 리얼하기 때문이다.
최정례(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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